Ricoh Caplio R10
본 리뷰는월간 포토넷의 의뢰로 작성되었습니다.
2006년 6월호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2003년 겨울, 필자는 성능이 뛰어나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서브 카메라를 찾고 있었다. 이때 구입한 것이 Ricoh R10. 필자가 R10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 일본인 사진가의 작업 덕분이었는데, 짙은 듯 하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컨트라스트, 차가우면서도 향수를 자극하는 이미지들에 자꾸만 눈길이 갔던 탓이었을 거다. 실제 사용해 본 R10은 그다지 예쁘지도 않고, 스위치를 켤 때마다 매번 세팅을 해줘야 하는 전형적인 똑딱이였지만, ‘Leica R10’이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Leica를 연상시키는 색 재현력과 풍부한 톤이 뛰어난 카메라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정도 가격에 그 정도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몇 손가락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디지털 시대의 Ricoh는 GR digital이라는 유니크한 아이템을 내놓고 있지만, 여전히 메이저로 인식되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든 다수의 유저들은 Ricoh를 복사기 브랜드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물론, Ricoh의 카메라 사업부는 생각보다 작은 규모가 아니다.) 그런 Ricoh가 새롭게 선보이고 있는 Caplio R4는 어떤 카메라일까? 처음 찾아본 R4의 스펙은 크게 시선을 끌만하지는 않았다. F3.3-4.8의 가변 조리개, ISO 64-800의 연동 범위, 흔들림 보정 기능, 2.5인치 15만 화소의 LCD, 95*53*26mm의 크기. 근래의 주류 디지털 카메라와 스펙면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단지, 200mm 최대 망원에서도 가능한 1cm 매크로 기능 정도가 눈에 띄었다고 할 수 있다.
며칠 후, 실제로 만난 R4는 예상처럼 밋밋한 카메라는 아니었다. 두툼하면서도 바디의 우측이 뒤로 꺾인 디자인, 겉보기와는 다른 묵직함, 블랙에 실버로 처리된 색 배합을 통해 R4는 “정말 평범해 보이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찬찬히 들여다보며 필자는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카메라는 그립을 향상시키기 위해 우측 전면을 돌출시켜서 손가락을 걸도록 하는데, R4는 거꾸로 우측을 돌출 없이 뒤로 꺾고 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손아귀에 감기면서 안정적인 그립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R10도 ‘뒤로 꺾인 그립’을 제공했었다.) 크기에 비해 느껴지는 무게감과 단단한 만듦새도 평범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디자인은 전혀 다르지만 어딘지 GR digital을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다. 오작동을 막기 위해 깊숙이 들어가있는 버튼을 누르면 렌즈가 2단으로 튀어나오며 스탠바이 된다. 기동 시간은 1초 정도. 꽤 빠른 속도이다.
정작 놀라운 것은 렌즈의 구경인데, 이 정도 구경의 렌즈를 탑재한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는 Leica의 일부 제품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렌즈의 구경을 키우는 것은 화질 보전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줌을 당겨보니, 렌즈가 다시 3단으로 변신하며 길게 튀어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유저들이 대책 없이 길어지는 렌즈를 ‘코끼리 코’라고 부르며 싫어하는데, 정작 R4는 렌즈의 구경이 워낙 크기에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도적이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코끼리 코’가 해결된 셈이다. 반 셔터를 잡아보았다.
상당히 빠르게 초점을 잡으며, LCD에 작은 사각형들로 초점 영역이 표시된다. 셔터감은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이고, 셔터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경쾌한 릴리즈 후 이미지가 저장되는 시간은 매우 짧다. ‘밋밋할 것이다’라는 선입관이 ‘절묘하게 밸런스가 맞는군’이라는 평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미지 프로세싱에 대해서는 좀 더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적어도 기계적 성능의 ‘밸런스’와 이전 모델들의 장점을 이어받은 만듦새를 통해 평범함을 충분히 극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필자는 R4와 함께 산책에 나섰다. 원색이 찬연한 삼청동에서, 유채가 만발한 한강까지 계속된 하루 동안의 산책을 통해 필자는 R4가 어느 정도나 Ricoh의 미덕을 지켜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필자가 Ricoh의 미덕이라 부르는 것은, 대부분의 여타 저가형 렌즈와 달리, 빛 조건과 관계없이 고른 결과물을 보여주는 Ricoh 렌즈들의 특성이다.) 다양한 풍경과 벽의 표정들, 꽃과 반영, 길을 스케치하면서 느낀 것은, R4는 그야말로 Ricoh의 미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R4의 표현력은 광량으로부터 독립적이었으며, 더 나아가, 화사하지만 들뜨지 않은 색감과 특정 색에 치우치지 않는 발색을 통해 충실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 프로세싱에서도 절묘한 ‘밸런스’와 Ricoh 특유의 장점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며칠 간 만져본 R4는 몇 가지 아쉬운 부분도 보여주고 있다. 최대개방이 F3.3으로 어두운 편이고, CCD Shift를 통한 흔들림 보정 방식은 광학식에 비해 성능이 떨어진다는 점, 어두운 곳에서 촬영 시 LCD에 나타나는 노이즈 등은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대부분의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가 동일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4가 기계적인 측면이나 이미지 프로세싱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잘 튜닝된, 그래서 각각의 기능과 요소들이 적절하게 밸런스를 유지하는 카메라라는 점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 사용하는 순간 그 평범함 속에 숨어있는 만만치 않은 솜씨가 느껴지는 카메라라고 할까. R4는 확실히 밋밋한 카메라는 아니다.
얼마 전 필자는 지인의 손목에서 Ricoh 시계를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Ricoh에서 시계도 만드나요? 기념품 같지는 않은데…” “아뇨. Ricoh라는 곳은 재미있는 일을 좋아하는 회사지요. 이 시계는 새로 개발된 광전지를 시험하기 위해 만든 거에요. 이 숫자판이 집광부지요.” R4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어쩌면 Ricoh의 엔지니어들은 R4에 어이없이 큰 구경의 렌즈를 달면서, 또 ‘뒤로 꺾인 그립’의 설계도를 보면서 재미있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R4의 또 다른 특징은 위트일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디자인을 통해 눈길을 끌거나, 특이한 기능을 집어넣어 소문거리를 만들어내는 카메라는 아니지만, R4는 평범함 속에 탄탄한 기본기와 밸런스를 튜닝하고, 위트를 추가한 재미있는 카메라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당신이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보다 심심하지만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음식을 좋아하고, 평범함 속에 숨겨진 1%의 차이를 추구한다면, Ricoh Caplio R4는 당신을 위한 카메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