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 Bellmer
THE DOLLS 라는 책의 표지에 쓰인 HANS BELLMER 의 작품.
Hans Bellmer /1902~1975
독일 조각가·초현실주의화가·사진 작가.슐레지엔의 카로비체 출생.
베를린 공예학교에서 배우고, 기사(技師)가 되기 위한 직업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상업디자인 일을 하였으나, 나치즘의 발흥에 대한 일종의 반항으로서 1933년부터 관절이 없는 기묘한 소녀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인형으로 그에게는 적합한 활동분야가 열리게 되었다. 36년 나치스를 피해 파리로 이주하여, 38년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해부학을 재창조하는 듯한 정밀한 선묘사(線描寫)와 에로틱한 이미지로 전개하는 회화세계는 당당한 극적 표현과 함께 특이함을 보여 주었다.
독일의 화가이자 조형작가. 관절이 움직이는 마네킹과 동판화, 소묘 등으로 병적 에로티시즘과 억눌린 성 욕망의 표출로 인한 섬뜩함의 미학을 표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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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폴란드 슐레지엔 지방의 카드비체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에서다다이즘 운동에 가담하며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일했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파리에서 정착하였다. 1923년부터 관절이 움직이는 여자 마네킹을 만들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촬영하는 일을 시작하여 쉬르레알리스트로부터 주목을 받았는데, 마네킹은 쉬르레알리슴의 전형적인 오브제이기 때문이었다.
1938년에 파리로 옮긴 후부터는 여자 마네킹의 손과 발을 이리저리 분해하고 조합하여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표현을 한 ‘인형’(10장의 사진 위에 수채물감, 78.1×20.9㎝, 1935)을 발표했는데, 섬뜩함의 미학을 극단으로 추구한 작품이다. 억눌린 성의 욕망과 그로 인한 도착 등 인간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던 상황이 의식의 세계로 비집고 나올 때 이런 종류의 섬뜩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오페라에는 너무나 아름다워 진짜 한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된 여자 인형과 아이들의 눈을 찢어 벌하는 모래인간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캐릭터에서 받은 영감이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하게 표출되면서 이러한 도착적 이미지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소묘에도 뛰어나 기묘한 관절을 가진 합성인간을 소묘로 묘사하기도 했으나, 주로 마네킹이나 동판화를 통하여 병적인 에로티시즘을 편집광적으로 추구하였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그밖에 ‘안구담(眼球譚)(1944)’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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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6. 2003 | 이제는 인형 마니아들 사이에서 그리 낯선 대상이 아닌 구체관절인형의 시초를 이야기할 때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작품이 있다. 바로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작가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관절인형들이다. 물론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보다 많은 인형공예가들의 이름이 등장하겠지만, 인형을 단순한 수집과 감상의 대상이 아닌 현대예술의 주인공으로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벨머의 활약상은 인상적이다.
오늘날 인형작가 뿐 아니라 회화, 판화, 그래픽디자인, 사진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 벨머였지만,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베를린 공대로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운명은 엔지니어가 되는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 게오르그 그로츠, 오토 딕스, 존 하트필드 같은 화가들을 사귀면서 벨머는 전공 공부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만다. 나치로부터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벨머의 화가 친구들은 사진몽타주에도 일가견을 지녔는데, 이는 벨머가 추후에 직접 만든 인형 오브제를 찍으면서 작업의 또 다른 방편으로 사진을 도입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분절된 신체 - 직접 만든 인형의 신체를 결박하거나
미완성된 상태로 사진을 찍어 작품을 완성한다
‘Poupee’ in Hayloft, 1935 ~ 36
Artwork Images - John Coplans
Artwork Images - John Coplans
예술가자신이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벨머 만큼은 아닐 것 같다.
그는 지금은 독일령이 된 폴란드에서 엔지니어이자 열렬한 나치당원이었던 권위적인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공대에 들어갔지만그는 이내 예술의 길을 택했다.
기술적으로 분류하자면 그는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사진 작가이다. 그의 인형 시리즈는 아직도 충격적이다.
1933년 한참 나치의 제 3제국이 봉기했을바로 그때, 그는 예술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히틀러,아버지, 권력에 대한 환멸을 느꼈던 그의 작품이 오히려 폭력적으로 특히 여성에 대한 사디즘을 드러낸다는 것은 델리케이트한점이다.
아무튼 그의 작품의 주제는 두가지로 압축된다. 섹스와 죽음이 그것이다.
거기에 그의 불행한 가정사와 시대 상황을 투영하게 되면 한편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폐렴으로 일찍 죽고, 둘째 아내와도 이혼하게 되어 자신의 쌍둥이 딸들과는 일생 떨어져 지낸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정신 분열증으로 그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한다.
그가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는 그가 포로 수용소에서 지낼무렵죽었다.
그는 그 사실을 예술가로서 성공한 한참 후에야 전해 듣게 되었다. 결국 그 역시 알콜 중독과 암으로 생을 마쳤다.
그래서 일까. 그의 작품은 늘 죽음과 공포의 분위기로 가득하다.
그가 추구했던 에로티시즘 역시 아름답다기 보다 발작적이고 기이하고 무섭다.
그는 그토록 많은 여자들과 함께 했지만, 그보다 한참 어린 사촌 여동생에 대한 성적 갈망과 환상을 오랜동안 간직해 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늘 어린 사춘기 소녀에 대한 성적 판타지로 가득하다. 물론 인형의 몸을 빌어 표현한 것이긴 하지만..
말년에 그가 찍은 작품은 거의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수준이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의 성기를 찍는다던지 철사줄로 꽁꽁 묶어 놓고 찍는다던지..
거의 변태 혹은 성 도착에 가까운 작업을 해왔다.
인형 오브제를 초현실주의 예술로 승화시킨 대표작가
1930년대 초반에 이미 화가로, 능력 있는 그래픽디자이너로 정평이 났던 벨머였지만 나치집단이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술가들을 퇴폐예술가로 단정짓고 압박을 가해옴에 따라, 독일을 떠나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벨머의 학창시절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사진몽타주의 기괴한 효과를 즐겼지만, 벨머는 찍은 사진을 오려붙여 재구성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처음부터 인형 오브제를 원하는 구도로 배치하고 완결된 이미지로 촬영함으로써 이른바 연출사진의 선례를 만들었다.
벨머는 1933년부터 등신대의 여성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를 소재로 강박적인 욕망을 담은 사진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인형은 불안정해 보이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그란 관절 부위가 노출돼 부품이 해체된 기계인간을 연상시키는 이 인형은, 동물처럼 엎드린 사실적인 여성조각을 탁자 삼고, 하이힐 신은 여성 다리로 의자를 만들며 성적 공상을 표출했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찬미의 대상이 됐다. 그 결과 초현실주의 소식지 ‘미노토르 Minotaure’에 벨머의 인형 사진 18점이 대거 소개됐고 같은 해에 인형 사진집 ‘Die Puppe(The Doll)’가 출간되기도 했다.
생물 유기체적 드로잉 - 섬세한 선이 중첩되면서
초현실적인 생물체의 기이한 현상이 드러난다
파편화된 몸 속에 담긴 숙명적인 비장함
여성의 몸을 분해하고 결박한 벨머의 인형은 흔히 사디즘과 연계돼 설명된다. 특히 성적 기관에 초점을 맞춘 벨머의 인형은 페티시즘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인형을 단순히 비일상적인 욕망의 투사물로 치부하기에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얼굴 없이 하반신과 하반신끼리 접합된 기형적인 신체, 가슴과 성기만 덩그러니 남은 토르소는 기괴한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이는 태어날 때부터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 완결된 아름다움을 지닌 인형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시도이기도 하다. 결핍을 내재한 존재로 태어나 완성을 기다리는 부서진 육체는, 흑백사진 속에 붙박여 영구히 미완의 대상으로 남겨지면서 숙명적인 비장함을 띠게 된다. 벨머의 인형이 인상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벨머는 인형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화가로서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강박적인 작품 성향이 장점으로 승화된 섬세한 드로잉 실력에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맞물린 드로잉과 동판화 등에 그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또한 그는 틈틈이 ‘Les Jeux de la Poup-23e (1949)’‘L’Anatomie de l’Image(1957)’ 같은 책을 펴내며 저술가로 활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직 국내에는 한스 벨머의 작품을 소개한 번역서가 없지만, 벨머에 대해 보다 깊이 알고 싶다면 테레즈 리히텐슈타인이 쓴 ‘Behind Closed Doors : The Art of Hans Bellmer’와 수 테일러가 쓴 ‘Hans Bellmer : The Anatomy of Anxiety‘를 추천한다.
다다이즘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H.발이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인 T.차라, R.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非審美的)인 것을 찬미하였다.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헤히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 ·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림. 고안자는 J.하트필드라고도 한다)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反戰) 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베를린에서의 다다이즘은 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 인물은 K.슈비터스였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어 1923~1932년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되는 작품은 ‘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콜라주는 다다이즘의 유력한 무기인데, 일찍이 입체주의(큐비즘)의 P.코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경우에는 응용하는 소재를 신문지 ·우표 등에서 우모(羽毛) ·철사 ·성냥개비 ·화폐 등으로 더욱 넓히고 있으므로 작품 효과는 입체주의 시대의 것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슈비터스는 콜라주의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쾰른에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19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1924년에 초현실주의(surréalisme)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뉴욕에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裸體)’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光彩)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高速寫眞)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未來派)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旣成品)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917)’이냐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F.피카비아, H.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H.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다다이즘은 제2차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 ’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었다.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등의 이유에서였다.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는 R.리히텐슈타인, J.팅게리, C.올덴버그, H.로젠버그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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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Wallumød Ensemble
A Year From Easter
Christian Wallumrød - piano
Toy Harmonium - piano
Nils Økland - violin
Hardanger fiddle - viola
Arve Henriksen - trumpet
Per Oddvar Johansen - drums
Recorded September 2004
ECM 1901
얀 가바렉을 배출한 북유럽 재즈의 대표적인 강국 노르웨이 출신으로,
독창적인 실험 정신으로 ECM 음악의 미래를 대변하는 연주자로
각광받고 있는 건반 주자 크리스티안 월룸뢰드가
ECM에서 발표하는 세 번째 리더작.
아르베 헨릭슨, 페르 오드바르 요한센, 닐스 오클랜드라는
노르웨이 최고의 연주자들과 함께 쿼텟을 이루어
서정적이면서도 격동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끊임없는 창조력과 감성적인 터치를 통해
북 유럽 재즈는 그 새로운 지평을 바라본다.
이 앨범은 다른 평가를 받을 만하다.
당신이 바라는 완벽에 가장 가까운 작품일 것이다.”
덩칸 헤이닝. Jazzwise
“매우 조용하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닌 작품.”
존 포댐, The Guardian
Christian Wallumød Ensemble - A Year From Easter - Stompin' At Gaga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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