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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 Jazz

Henri Cartier Bresson

HENRI CARTIER BRESSON

국내에서 가장 지명도 있는 해외 사진작가는 아마도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아닐까 싶다

Henri Cartier-Bresson, France1908-2004

'이세상에 결정적인 순간 아닌 순간은 없다' - Cardinal Retz

...The Decisive Moment, 순간의 미학, 그를 떠올리는 것들.













France. Paris. Boulevard Diderot. 1968

FRANCE, 1932

FRANCE. 1932


FRANCE. Rue Mouffetard. 1952


Paris, 14th Arrondissement, Rue d'Alésia, 1961
Alberto GIACOMETTI, Swiss painter and sculptor.


Paris. Pont des Arts. 1946.
French writer and philosopher, Jean-Paul SARTRE
To the right: French writer, Jean PAULHAN


USA. New York City. 1947. Manhattan. Downtown.




















Preface to the book "I Tempi di Roma"
(Edizioni Bolis, Italy, 2000) written by Henri Cartier-Bresson.

It reads "Time runs and flows and only our death can stop it.
The photograph is a guillotine blade that seizes one dazzling instant in eternity." .
...Henri Cartier-Bresson


까르띠에-브레쏭(Cartier-Bresson)이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이제까지의 사진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일면이 있었다.

그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분법적인 입장에서 대상을 논리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직관에 의한 생명적인 공감으로 파악하려 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주장에 의하면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하나는 대상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에 들어가서 직접 경험하는 방법이다.

까르띠에-브레쏭은 직관을 통해 생동하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가 생명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방법은 대상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상 속에 들어가서 대상과 함께 하나로 공감하려는 경험적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까르띠에-브레쏭의 사진적 관점은 '너'와 '나'라는 상대적 입장이 아니라 '우리'라는 절대적 입장이다.
까르띠에-브레쏭의 대상을 인식하는 입장이 특이한 것은 대상의 본질에 대한 견해이다.

그는 모든 대상의 궁극적인 실재는 생명력이라고 보았다.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의 배후에 어떤 불변의 실체(實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실재(實在)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그 자체,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의 본질을 시각적인 조형 원리로 파악하려는 '새로운 시각(New Vision)'주의자들, 광학적인 냉철한 시각으로 대상의 본체를 철저하게 객관화하려는 즉물주의자 등과는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이 달랐다.

생명력은 물질적인 것과는 달리 끊임없이 생성하고 약동하는 지속적인 것이어서, 그의 생명적 직관은 지속(持續)의 직관으로,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지속을 사진기에 담으려 하였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카르띠에-브레쏭은 대상을 시·공간적으로 파악했다.

일반적인 경우 시간과 공간을 분리된 독립적 범주로 파악하지만, 그는 이 둘을 서로 뗄 수 없는 통합된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즉 생명적인 본질은 결코 분석적으로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하나로 통합된 전체성을 갖는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대상에 대한 접근 방식은 하나로서의 전체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사진은 기계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에 표현이 단순하고 제약조건이 많아 과연 예술일 수가 있는가 하는 예술적 타당성에 대한 반문이 많이 있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사진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경우, 사진의 표현적인 한계를 타개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까르띠에-브레쏭은 이와는 정반대로 의도적으로 가장 평범하고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사진의 기록적 속성 그대로 표현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그렇고, 주제를 다루는 자신의 사진적 시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까르띠에 브레쏭은 소재가 가장 함축적인 국면을 드러내며, 환기력을 가장 잘 발휘하는 형상에 놓이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읽어내는 데에 능했다.

그는 소형 사진기가 그런 것을 즉시 사진에 담게 할 수 있는―마치 육안의 연장처럼―이상적인 무기임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우연에 의존하는 것과는 결코 다른 것이다. 그는 파인더를 통해 항상 음화 전체의 짜임새를 고려하며 구성한다.

그의 초기 작품들 ―그는 1932년 그의 첫 번째 라이카를 구입했다 ― 에는 형태의 강조와 더불어 평범한 눈으로는 시공(時空)에서 보이지 않을 그런 평범한 것의 측면을 포획한 기쁨이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보다 열정적인 것이었다.

1938년 런던에서의 조지Ⅵ세의 대관식 사진과 같은 거의 풍자화에 가까운 작품도 적지않게 제작했다.

거기에서 그는 화려한 구경거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구경꾼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렌즈에 의해 맺히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이미지가, 형태와 표현 그리고 내용의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한 조화를 획득하는, 바로 그 절정의 한 순간을 붙잡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신속하게 계속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35mm 사진기의 능력을 잘 보여준 탁월한 사례를 남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작업하고 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주로 전세계를 무대로 촬영 여행을 하는 것으로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 찍은 사진이든 민족적 특징이나 국가마다의 고유한 지역적 색채가 전혀 풍기지 않고 거의 똑같이 일상적 상황만이 공통되게 처리되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찍힌 대상들의 개별적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오직 일상적 상황만이 한결같이 부각되어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점이 까르띠에-브레쏭의 사진 미학에서 주목되는 특징의 하나이다.

그의 사진에서의 주제는 언제나 일상적 상황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사진에 담으려는 주제가 이렇게 평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또한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그는 오로지 라이카 사진기에 거의 대부분 50mm 렌즈를 끼고 대상을 찍었다. 예외로 광각렌즈나 망원렌즈를 쓸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고작 35mm 광각렌즈나 준(準) 망원렌즈를 사용할 뿐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평범한 시선의 궤도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일상적 시선으로 모든 사진의 대상들을 처리하였던 것이다.


까르띠에-브레쏭의『결정적 순간』이 지니고 있는 의의는 촬영 기법의 기민한 반응, 즉 명사수가 표적의 한가운데를 꿰뚫는 놀라운 적중률과 같은 단계를 하나 더 넘어선 것이다. 그의 사진에서 누구나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의미 내용과 사진적 형식의 완전에 가까운 일치는 뒤집어서 생각하면, 사진이 본능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내용과 언어와의 자동적인 일치기능에서 온 동일한 의미전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사진에 대한 완성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50년대의 새로운 영상사진의 등장을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젊은 세대들에 의해 전개된 영상사진의 새로운 성격은 인간의 내면의식과 영상언어의 심층적인 일치에 대한 추구였다.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윌리암 클래인(Wiliam Klein), 그리고 엘스킨(Van Der Elsken) 등에 의해 주도된 영상사진의 새로운 자각은 이미 까르띠에-브레쏭의 사진작업에서 자각된 실마리의 본격적이며 적극적인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의 선승(Zen master)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을 말하면서 아마도 그의 사진집 제목으로부터 유래된 <결정적 순간 Image a La Sauvett, The Decisive moment>를 언급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까르띠에 브레송은 단순히 <결정적 순간>으로 응축되기에는 그 폭이 너무나 큰 작가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는 사진 예술을 통해 철학(哲學)한 인물이자 후대의 많은 사진 작가들에게 있어 숱한 영감과 감화를 준 위대한 사상가의 풍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어떤 말이나 글로 전했다기 보다는 그의 사진작업들을 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진 기자이기도 했다.

Image의 추구

까르띠에 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섬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까르띠에 브레송은 어려서부터 미술을 비롯해 당대의 여러 예술적 경향들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조건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후일 그가 사진 작업을 통해 평생 이미지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게 되는 첫 출발점이었다.

그는 처음엔 화가가 될 생각으로 1927년부터 2년 동안 그림을 공부했다.

그는 자크 에밀 블랑슈, 앙드레 로트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초현실파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테리아드 출판사를 드나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형상(image)의 엄격성에 집중된다.

아프리카에 체류하면서 라이카 카메라를 처음 구입한 그는 멕시코, 미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폴 스트랜드 곁에서 영화를 배우고, 1932년에는 줄리안 레비 화랑에서 처녀전을 열기도 한다.

또 프랑스로 귀향한 뒤로 장 르누아르와 자크 베케르 감독과 함께 영화제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스물 두 살 무렵이던 1930년 마르세이유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평생 라이카 카메라만을 애용했다.

당시는 중형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가 라이카를 즐겨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르포르타주 사진가로 활동한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

1932년부터 2년 동안 스페인 지중해 연안, 멕시코, 미국의 각지를 다니면서 각종 사진을 찍었다.

<폐허에서 노는 아이들>은 이때에 그가 찍은 대표작이다. 1936년 봄, 그는 파리의 어느 신문사 사진부에 들어가기 위해 입사시험을 보았는데 낙방하고 말았다.

이때 헝가리 출신의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세이무어도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그날 우연히 들른 어느 카페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날의 만남에서 의기투합한 그들은 후일 이란 사진작가들의 연합통신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역시 프랑스군에 종군하여 영화사진반에 참가했으나 1940년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몇 번의 탈출 시도 끝에 1943년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이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했고, 이때부터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들의 인물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까르띠에 브레송은 전쟁 후에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uge), 루오(Georges Rouault) 등을 촬영하며 예술가의 내면의 깊이를 어떻게 화면에 정착시킬 것인가에 노력을 쏟았다.

종전 후인 1946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린 그의 작품전을 통해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듬해인 1947년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 등이 중심이 되어 <매그넘MAGNUM>을 설립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사진기자들의 불안한 지위와 특정 매체(신문사와 잡지)의 틀에 박힌 편집 방향과 포맷으로부터 벗어나 사진가의 개인의 관심과 개성 그리고 자유로운 해석을 보장받기 위해 창립된 사진 에이전시가 바로 <매그넘>이다.

(그러나 이런 매그넘의 경향과 탄생이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름인 매그넘MAGNUM이 '크다'라는 의미의 희랍어로 위대한 사진가를 지칭한다고 하지만 이는 동시에 대형연발권총을 의미하는 영어‘Magnum’의 동음이의적 관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탄생이 처음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었고, 근대성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매그넘은 닫힌 서구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경제적 착취와 기존 매체들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설립된 국제보도사진가 집단체로 세계에서 가장 실력있는 사진통신사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설립 이듬해 뉴욕에도 사무실을 개설했다.

매그넘의 주요사진가이자 주요 설립자 중 하나였던 카파는 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고, 침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데이비드 세이무어는 1956년 수에즈 상륙작전 때 사망했고, 베르너 비쇼프는 1954년 페루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매그넘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후로도 주로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젊은 신세대 사진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더욱 규모를 키워나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브레송은 그후 3년 동안 중공, 인도, 버마, 인도네시아, 이란 등으로 여행하여 동양 민족의 생활과 그 풍토를 촬영하였다. 그 사진들은 중공이 정권을 잡기 전후의 민중의 혼란 상태와 인도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태 등을 박진감 있게 표현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그의 첫번째 대형 사진집은 <재빠른 영상들>(1952)이다. 거의 20여 년간 그는 세계를 누비면서 당대의 가장 위대한 탐방기자로 대접받았다.

그는 이제 다시금 그림으로 돌아와 있지만 그것은 그에게는 현실과 시각의 본질적인 문제를 추구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 후 또다시 소련을 여행하며 공산주의 정권 아래의 민중의 일상생활 모습을 촬영하고 발표하는 한편 1955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진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진가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중량감있는 사진 표현으로 보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결정적 순간

만약 그가 단지 그냥 한 명의 충실한 보도사진가라면 그가 지금처럼 유명한 사진작가로 추앙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보다 한발 더 나갔기 때문이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천재성은 매그넘의 모험을 따랐으나 자기 자신은 그보다 더 멀리 앞서 나갔다.

그러나 1933년의 스페인 여행에서 그는 본격적인 르포르타주 사진에 착수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이 두뇌를 써서 사공한 이미지보다 "결정적 순간"의 탐구에 훨씬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자의 사진찍는 행위를 가장 완벽하게 정의했던 인물이 바로 까르띠에 브레송이다.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순간에 동시에 인지되는 것이다."

현실의 어떤 치밀한 순간을 포착하고 또 형태들이 함께 어울리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이미지에서는 다소 차가우면서도 섬세한 멋이 나며, 그것은 찬양도 비판도 아닌, 단지 현실을 꼼꼼히 분해하고 거기에 어떤 스타일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르포르타주는 승리를 거두고 있으면서도,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하는 사진가와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념적 체제 사이의 분열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불과 극소수의 작가들만이 가장 생생한(거친) 사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표현 욕구에 제동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출처 : 레이카클럽.

Barney Wilen- French Ballds, 1987/Sous Le Ciel De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