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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Art

블루스의 발생과 시대별 변천 연구

































I. 머리말

블루스(Blues)는 흔히 재즈의 일종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블루스가 재즈 발전의 초기부터 재즈밴드에 의해 연주되기도 했고, 블루스 형식을 따른 재즈곡이 다수 녹음으로 남아 있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블루스 초기 음반녹음에서 반주를 재즈 밴드가 담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블루스는 재즈의 탄생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발전에도 관련을 맺고 있기는 하나, 평생을 블루스만 연주했던 블루스 주자들도 수없이 많으며, 재즈와 구별되는 블루스 자체의 독자적인 스타일들도 계속 발전되어 왔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발전은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배경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본고장에서는 흔히 재즈의 탄생에 밑거름이 된 것 정도로만 여겨지는 블루스가
시기에 따라 역사적·음악적으로 어떤 변천을 겪어왔는지를 사회문화적 배경의 변천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II. 시기별 변천

블루스는 흑인노예들의 탄식이나 신세한탄이 차차 노래의 틀을 갖추게 되면서 발전하게 된 음악이다. 재즈처럼 단순한 구조적 틀 안에서 즉흥연주를 가미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틀은 재즈에서보다도 상대적으로 훨씬 단순하다(아래 II-1-2)의 ‘블루스의 성립과 전파’ 부분 참조; 심상범 2002:43-45).1) 블루스에서 중요한 것은 그 구조 자체가 아니라 괴로움과 어려운 삶을 잠시 잊기 위한 일회성의 즉흥적인 감정적 표현이었다. 블루스의 전형적인 음악적 특징 중의 하나인 하행 선율도 이런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음을 독특하게 처리하는 표현적인 창법, 즉 목소리를 떨거나 굴절시키고 한숨이나 외침 등을 가미시키는 방법은 블루스를 원초적이고 감각적으로 들리게 한다(Allen 1995:12).2) 가사 자체도 물론 유래가 없을 정도로 직접적이고 솔직하다.

블루스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후 1920년대부터는 대략 10년을 주기로 새로운 스타일이 나타나나, 다른 한편으로는 옛 스타일들도 여전히 존속하거나 리바이벌되기도 하고, 1920-40년대에는 새로운 소재를 찾던(특히 미국의) 일부 작곡가들에 의해 클래식 음악과의 접목도 시도된다.3) 블루스 스타일의 큰 변화로는, 부르거나 듣기 위한 어두운 분위기의 노래에서 1930년대에 부분적이기는 하나 춤출 수 있는 활기찬 노래로 전환되는 것, 1940년대 후반에는 관악 섹션까지 포함된 밴드가 반주하게 되는 것, 그리고 1950년대에는 로큰롤(Rock ‘n’ Roll)과 이후의 록 창출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1. 1890년대-1910년대: 블루스의 등장

블루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라바마 태생의 흑인 윌리엄 크리스토퍼 핸디(William Christopher Handy 1873-1958)는 1903년에 블루스를 처음 들었던 것으로 회고한 바 있는데, 사실 블루스란 단어도 1910년대에 출판된 그의 노래 제목에서 나타났다(Bontemps 1991:3). 그러나 블루스의 시작 자체는 적어도 19세기 중후반까지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 기원으로는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 또는 그 후예들이 부르던 노동요(Field Holler), 흑인영가(Negro Spiritual), 복음성가(Gospel) 등을 들 수 있다.


1) 기원

① 노동요

17세기 말경부터 노예농장 등에서 불리던 노동요는 영어 명칭이 ‘외치다’라는 뜻의 ‘할러(Holler)’인 것처럼, 자유로운 리듬과 특히 ‘가성적 외침’이 특징적이고, 선율도 말과 음악의 중간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행은 독창 선창자의 ‘메기기’(Call)와 합창의 ‘받기’(Response)가 계속 상호 교환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Floyd Jr. 2000:14-15).4) 이런 방식과 가성적 외침 등은 이후 블루스를 비롯한 흑인음악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존속되는 것이기도 한데, 블루스의 창법 자체가 노동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Sadie 2001:730).
노동요는 일의 능률을 올렸기 때문에 농장주들이 용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노동요의 표현적인 창법에 대해서는, 이것이 매우 직접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농장주들이 선동의 위험이 있다는 판단 아래 슬픈 노래를 금지시키고 밝거나 의미 없는 음절들의 가사를 권하기도 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Kemble 1995:13).

② 흑인영가

흑인영가는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노예제도 폐지가 제안될 무렵, 분노한 백인들(영국계)에 의해 교회에서 쫓겨난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분리된 교회를 세우면서 그들 사이에서 불려지던 찬송가이다. 흑인영가가 이들의 종교음악이라면, 이후의 블루스는 이들의 세속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흑인영가에 도입된 아프리카적 특징으로는 발을 구르며 치는 반복적 패턴(오스티나토)의 박수(특히 약박에서의 박수가 특징적), 교회 앞에서의 원무(圓舞; Ring-shout) 등과, 흑인 특유의 표현적 창법을 들 수 있다. 아프리카 식의 방언으로 발음되는 영어의 변형도 독특하다(Garst 1986:390 이하). 소재는 주로 구약성서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며, 5음 음계에 기초한 선율이 많다. 싱커페이션과 메기고 받는 형식도 흑인음악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Hitchcock 1974: 96 이하).

흑인영가는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백인을 위한 대중오락의 하나였던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 유랑 연예인들의 쇼)에서도 자주 불리게 되고(Lott 1993: Chap.1),5) 특히 테네시 주 내슈빌에 설립된 피스크 대학의 합창단('피스크 주빌리 싱어스' Pisk Jubilee Singers)이 1871년부터 미국 각지와 유럽을 순회공연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깊은 강>(Deep River), <여리고의 전투>(Josuah Fit the Battle of Jerico) 등 많은 영가들이 흑인 민요로 현재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다.

③ 복음성가

복음성가 찬송가(Gospel Hymn)는 19세기 후반에 유행한 찬송가로서 부흥 전도 집회에서 많이 불렸던 것을 말한다. 이 집회는 원래 신앙부흥운동으로서 백인들이 시작한 것이지만, 아프리카의 종교의식과 흡사한 관계로 흑인들이 그 곳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차차 흑인들만 남게 된 것이다. 복음성가는 흑인영가보다는 상대적으로 강한 싱커페이션이 걸린 역동적인 리듬과 가성적 창법 등이 특징적이다. 흑인들은 차차 가정에서도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반주로 빨래 통에 매단 줄을 퉁기거나 빨래판을 문지르기도 했다. 현재까지 내려오는 곡들로는 <존귀한 주님>(Precious Lord) 등이 알려져 있다(Cockrell 1987: 417 이하).

덧붙여, 가스펠 찬송가는 1920년대 중반부터는 ‘가스펠 송’(Gospel Song)이라는 장르로도 가지가 난다. 후자는 종교적 의식과는 관계가 없는 종교적 팝송의 일종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오르간·피아노·기타 등의 반주악기를 대동한 강렬하고 매우 과시적인 노래들이다. 블루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낭송조의 색채가 짙다.6)
원래의 가스펠 찬송가 자체도 결코 그 역사가 블루스의 기원이 되었다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다. 블루스의 역사적 변천에서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 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50년대 이후에는 흑인음악 전반에 지속적인 자양분 역할을 하게 된다(아래 II-6의 ‘1960년대’ 참조).


2) 블루스의 성립과 전파

① 성립

블루스의 진원지는 미시시피 강 하구의 델타 지역으로 알려져 왔으며, 최근에는 세인트루이스나 플로리다도 블루스의 또 다른 진원지였다는 주장이 나와 있다(Ottenheimer 1990:87; Banes 1988:43). 블루스는 원래 무반주 노래로 출발했으나 곧 반주가 붙여졌다. 블루스에 반주악기로 처음 쓰인 것은 밴조와 피아노인데, 밴조는 피아노가 보급되기 전에 남부 시골에서 널리 사용되던 것이고, 피아노는 리듬 패턴(왼손)과 선율(오른손)을 동시에 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차차 폭넓게 선호되었다. 밴조 대신 기타가 사용되기도 했는데, 후자가 반주악기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반주 악기는 블루스에서 반주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메기기’와 ‘받기’에 해당하는 대화의 상대인 것이다.

초기 블루스에서의 밴조나 기타 반주는 흔히 ‘슬라이드 기타 스타일’(Slide-guitar Style)로 불리는 주법에 의한 것이었다(핸디가 처음 들었던 블루스도 이 스타일로 연주되었던 것이다(Bontemps 1991: 3 이하). 이 주법은 하와이언 기타(지판이 강철로 되어 있고 프렛이 없다)에서의 윙윙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방식과 같으나, 하와이언 기타에서 쓰이는 미끄럼 막대(Slide Bar) 대신에 주머니칼이나 금속관, 또는 유리병의 목을 잘라 가장자리에 열처리한 것이 쓰였다(왼손의 넷째나 새끼손가락에 낀다). 기타 연주자들은 이런 도구들을 이용해 지판 위의 현들을 누르면서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냈는데, 이 때 그것을 미세하게 흔들거나 아래쪽으로 현들을 따라 살짝 미끄러뜨림으로써 음색을 다양하게 변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7)

블루스는 1910년대에 전형적인 음악적 구조와 화성적·리듬적 특징을 갖추는데(이 시기부터 악보로 출판된다), 4/4박자, 12마디 패턴, I - IV - I - V - I 등과 같이 단순한 화성 진행으로 요약될 수 있다(Tanner and Gerow 1977:33).8) 즉, 3행시 형태의 12마디를 기본형으로 하고, 4마디씩 돌아가며 각각 I, IV, V도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전형적인 화성진행은 I / IV - I / V - I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화성 진행이나 12마디 패턴에 약간의 변형과 장식이 가미될 수 있으나, 이와 같은 근본적인 틀이 사용되지 않았다면, 제목이 블루스로 되어 있더라도 실제로는 블루스가 아닌 것으로 취급될 정도로 그 특징은 전형적인 것이다(이 틀이 얼마만큼 확장・변형되던 간에 현재까지도 이 틀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세광음악출판사 편집국 역 1995:48-49; Hitchcock 1974: 190 이하).9) 블루스의 실제 연주에서는 12마디 패턴이 변주 형태로 여러 번 반복되는데, 이 경우 각각의 12마디 패턴을 코러스(Chorus)라고 부른다(제1 코러스, 제2 코러스 등: Randel 1986:163). 그리고 각 코러스에는 흔히 다른 가사가 붙여진다.

주제선율(Riff)은 첫 4마디에 제시되며(두 마디씩 보컬과 기악 반주가 교대되는 경우가 많다: ‘메기기’와 ‘받기’), 다음 4마디에서는 반복되고, 마지막 4마디에서는 변형·장식되는 AA'B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화성이 변해도 그 변화에 맞추어 몇 번이고 반복 또는 변주반복 될 수 있도록 단순하고 짧은 것이 특징이다. 블루스 선율은 블루 노트에서 힘차게 시작하고 약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초기의 블루스에서는 블루7도에서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전형적인 선율은, 4마디를 단위로, 블루7도에서 시작하여 블루5도나 블루3도 또는 이 두 음 모두를 거쳐 으뜸음으로 진행하는 것이다(Sadie 2001:728; 세광음악출판사 편집국 역 1995:128, 132).

블루스의 조성은 대부분이 장조로 되어 있으나, 흔히 블루 노트의 사용으로 인해 블루 음계로 보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이 음계는 장음계에서 3도음과 7도음이 약간 낮추어진 것을 의미한다.10) 그러나 기보 상으로만 보면, 블루 음계는 사실 도리아 선법(2-3도음과 6-7도음 사이가 반음인 선법)과 똑같아서 그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그리고 원래 의미의 블루 노트 자체도 차차 도태된다).
<예 1> 블루 음계와 도리아 선법

(a) C 블루 음계: c - d - e♭ - f - g - a - b♭ - c1
(3도음과 7도음이 낮추어진 음계)

(b) C 도리아 : c - d - e♭ - f - g - a - b♭ - c1
(2〜3도음과 6〜7도음 사이가 반음인 선법)

같은 맥락으로, 블루 음계에서 7도음만 낮추어진 경우에는 믹소리디아 선법과 기보 상으로는 같게 된다. 초기 블루스에서는 블루 음계 외에, 흑인 영가 등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던 5음 음계도 계속 사용되었다.
블루스는 리듬에서도 서양음악과는 다른 독특함을 갖고 있다. 즉, 흑인영가나 가스펠 찬가처럼 첫째와 셋째 박자 대신 둘째와 넷째 박자에 악센트가 놓이고, 세부적인 리듬진행에서도 이런 특징이 적용됨으로써 밀고 당기는 기분의 역동성과 관능성이 느껴진다(뒤섞는 박[Shuffle Beat]라고도 한다).11)

②전파

블루스는 1910년대 후반에 델타 지역으로부터 주변 지역들(조지아[아틀란타], 텍사스, 루이지애나)뿐만 아니라 미시시피 강을 거쳐 중북부(멤피스,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뉴욕 등지 그리고 일부는 캘리포니아까지)로도 광범위하게 퍼졌다. 가장 큰 원인은 흑인들이 농업 중심의 남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북부 대도시의 공업지대로 일자리를 찾아 대거 이주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나, 이에 못지않게 혼자의 힘으로 그 전파에 엄청난 기여를 한 사람이 있다. 블루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핸디(W. C. Handy)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핸디는 조부와 부친이 모두 목사인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교육과 함께 코넷(Cornet)도 배우고 졸업 후(1893)에는 교사로 부임하는 등 당시 흑인으로서는 상류층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12) 그러나 그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폭넓은 음악활동과 음악사업을 추진했다(현악4중주단 결성, 민스트럴 쇼 그룹의 설립과 광범위한 유랑 연주, 흑인 밴드의 리더)(Bontemps 1991:Chaps 1-2).13) 그는 이와 같이 다망한 생활 중 1903년에 미시시피 주 클락스데일(Clarksdale)에서 ‘슬라이드 기타 스타일’의 블루스를 처음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 경험이 그를 역사적인 인물로 만든 계기가 된다. 즉, 그는 그 노래를 암기해서 저작권을 가졌고(: 1914년 출판), 1909년에는 중부의 멤피스로 이주해서 블루스 악보를 출판하고 출판사(Pace & Handy Music Co.)를 설립하며 밴드도 조직한다.14) 그리고 1917년에는 이 밴드의 연주가 음반으로도 제작되기에 이른다(콜럼비아 음반[뉴욕]). 멤피스가 이후 블루스와 로큰롤의 중심도시로 부상한 데는 핸디의 이와 같은 활동도 밑거름이 된 것이다.

핸디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18년에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브로드웨이에 출판사(Handy Brothers Music Company)를 설립하고, 1920년에는 그의 밴드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되는 역사적인 블루스 음반의 반주를 하게 된다(1920년대에 100만장이 팔림). 즉, 여성 블루스 보컬리스트 제1호인 메이미 스미스(Mamie Smith 1883-1946)의 가 그것이다(작곡가는 페리 브래드포드(Perry Bradford 1893-1970). 핸디는 그와 같은 활동을 30년대까지 유지하며 많은 노래에 대한 저작권(150여곡)을 갖고 그것들을 (흑인 작곡가/작사자 등 그 유래에 대한 설명과 함께) 출판하며 녹음도 했고(파라마운트(Paramount)와 오케이(Okeh) 음반 등) 또한 자신의 행적을 자서전으로까지 남김으로써, 초기 블루스에 대한 역사가 역할까지 톡톡히 해낸 것이다.15)
블루스는, 결과적으로, 당시 상대적으로 훨씬 더 서구화되었던 재즈와 시기적으로 함께 미국 대중음악문화산업의 오락물로 편입하게 되었다. 최초의 재즈 녹음도 역시 핸디의 악단 연주가 음반으로 제작된 1917년에 같이 이루어진다.


2. 1920년대: 클래식 여성 블루스와 컨트리 블루스

1920년대에는 블루스가 나이트클럽들을 중심으로 한 쇼 비지니스의 오락음악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특히 시카고 등을 비롯한 큰 도시에서는 흑인 여성들의 크고 정력적인 보컬을 특징으로 하는 블루스가 (3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맞이하여, 역사적으로 ‘클래식 여성 블루스’라는 명칭을 얻기도 한다. 반면, 다른 중소 도시나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는 단순한 남성 컨트리 블루스가 더 유행한다.

대부분의 여성 블루스 보컬리스트들은 ‘보드빌’(Vaudeville: 민스트럴 쇼와 영국식 극장 쇼가 결합된 것)이나 ‘텐트 쇼’ 등에서 가수·배우활동을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즉, 이들은 단순한 블루스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세련된 연예인들이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른 경우가 많지만, 몇몇은 대규모 재즈 밴드를 배경으로 한 예도 있다. 그러나 가사 자체는 노동요 시절의 가사 내용과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즉, 일상적으로 겪는 괴로움(가난, 학대, 파경, 질투 등)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며, 이 중에는 성(性)적 욕구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도 흔히 포함되어 있다(Campbell 1995:49 이하). 이와 관련되어 매우 흔하게 쓰였던 용어로는 록(흔들다 Rock)과 롤(구르다 Roll) 등을 들 수 있는데, 이후 이 두 용어의 합성어로서 1950년대에 등장하는 로큰롤은 그 용어 자체로만도 백인들에 의해 혐오감을 받았던 것이다(아래의 소제목 5 참조).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메이미 스미스가 클래식 여성 블루스 보컬리스트 제1호이고, 그 외에는 블루스의 '어머니'라 불린 마 레이니(Ma Rainey[Gertrude Pridgett] 1886-1939), 블루스의 여왕으로 불린 벳시 스미스(Bessie Smith 1894-1937) 등이 있다. 쇼 공연과는 달리, 음반 제작은 원래 흑인 구매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당시 일반 백인들은 블루스를 저속하고 상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100만 장이 팔린 음반 외에도, 벳시 스미스의 1923년도 음반은 75만장이 팔려나갔을 정도로, 대중음악의 음반산업 분야에서도 1920년대에는 이미 블루스가 큰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세광음악출판사 편집국 1995:130).

당시 이들은 선택받은 몇 안 되는 흑인에 속했지만, 처우에 관한 한 아직 현대적인 민스트럴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은 벳시 스미스의 죽음으로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벳시는, 지방 공연(미시시피)을 가는 도중 발생한 교통사고에서, 백인들만 응급차에 실려 가고 그녀에 대한 치료는 계속 거부되는 바람에 과도한 출혈로 숨지게 된다. 이런 진실도 20년 후에야 비로소 정확히 밝혀지게 된다(Albertson 1995:88).

컨트리 블루스를 부르던 남성 보컬리스트들은 클래식 여성 블루스 주자들처럼 세련된 연예인은 아니었다. 그들이 이전에 전해 들었던 민요나 블루스를 암기했다가 그 곡에 변화를 주며 부른 경우가 많았고, 기타나 하모니카 또는 둘 다로 직접 반주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컨트리 블루스의 소비 대상은 주로 시골이나 도시의 빈민층이었으며, 블루스 주자들 자신도 대부분 거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그들 가운데는 한 쪽 또는 양쪽 눈을 잃은 경우도 많았는데, 이들을 통해 당시 흑인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16) 컨트리 블루스의 가사 내용은, 클래식 여성 블루스와 별로 다를 것은 없지만, 주로 남성의 입장에 대한 것이며, 그 외에 ‘감옥살이’에 관한 내용의 ‘형무소 블루스’(Prison Blues)도 전형적인 것에 속한다. 다음의 가사는 그 한 예이다(가사도 블루스 형식의 AAB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예 2> 형무소 블루스의 가사(무명씨: Campbell 1995:54)17)
나는 13일 날 태어났고, 외동아들이지(반복).
세상의 그 많은 돈 중에서, 내 것은 하나도 없어.

나는 재수가 없어, 아무리 애를 써 봐도(반복).
캘리포니아 행을 탔는데, 상하이에 내렸지.

공부도 못했어. 이 도시에서 나는 그저 바보에 불과하지(반복).
입학 첫 날, 꼴좋게, 학교가 불탔거든.

컨트리 블루스의 대표주자들로는 델타 블루스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찰리 패튼(Charlie Patton 1887-1934), 아틀란타의 블라인드 블레이크(Blind Blake 1890년대 초-1933), 텍사스의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Blind Lemon Jefferson 1897-1929) 등 다수가 있다. 아틀란타(델타 지역과 동부 해안의 중간에 위치한 조지아 주의 주 도[州 道])에서는 1920년대부터 ‘슬라이드 기타’ 주법 대신 ‘싱글-스트링 주법’(Single-String 주법: 한 음 한 음 뜯는 기법으로서 선율 연주가 가능한 것, Finger-picking 주법이라고도 함)이 등장하며, 텍사스의 제퍼슨은 1926-1929년에 80장이 넘는 블루스를 녹음할 정도로 여성 보컬 블루스가 지배하던 시기에 매우 예외적으로 널리 활동했던 블루스 주자이다(즉흥적 패시지가 길고 복잡하다: Sadie 2001:731-732).18) 그러나 컨트리 블루스 음반의 경우에는 대부분 남부지역에서 지엽적으로 판매되는 정도였고 공중파를 타는 등의 홍보는 아직 생각할 수 없는 단계였다(이런 상황은 적어도 1950년대까지 지속된다, Guralnick 1992:69).

그 밖에 멤피스에서는 1920년대에 컨트리 블루스로서 포크 계열의 현악 밴드인 ‘저그 밴드’(Jug Band: 저그는 물병·주전자란 뜻)도 나타났다. 기타, 피들, 만돌린, 그리고 때로는 피아노도 포함된 밴드로서 재즈 콤보를 일찌감치 모방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유리병이나 질그릇 병에 바람을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등(튜바와 비슷한 소리가 내어 베이스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 시골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19)


3. 1930년대: 부기-우기와 도시 블루스

1930년대에는 특히 전축과 라디오에 의한 팝송의 선호와 백인적 재즈(춤음악으로서의 스윙(Swing))의 대유행으로 블루스가 일시적으로 침체기에 돌입하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블루스로 전환된다(심상범 2002:139-173). 즉, 흥겨운 분위기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외쳐대는 빠른 블루스인 부기-우기(Boogie-woogie)와 도시화된 컨트리 블루스(도시 블루스(Urban Blues))가 그것이다.

부기-우기는 원래 주로 싸구려 술집(Honky-tonk)과 집세를 마련하기 위한 파티(Rent-party) 등에서 연주되던 컨트리 블루스의 일종이었다(Ottenheimer 1990:87).20) 1920년대 말에는 도시로도 전파되어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음반으로도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경제 공황기인 1930년대 초반으로 가면서 재즈를 반주하는 빅 밴드보다는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이점을 갖고 폭넓게 유행하게 된 것이다. 부기-우기는 신나는 리듬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데 일조를 한 후에도 1940년대까지 계속 유행하게 되며, 이후 로큰롤에도 널리 도입 된다(Martin 2000: 169-170.21)

부기-우기는 4/4박자이나 8박자로 들리는 흥겹고 분주한 음악으로서, 블루스 화성진행을 토대로 한 피아노의 반복적인 왼손 베이스가 특징이다(대개 2마디 단위로 반복). 이때 오른손은 왼손과 독립적으로 흥겹고 빠른 트레몰로나 셋잇단음표의 진행 등의 즉흥연주를 하게 되어 있다(Tanner and Gerow 1977:71-72).22)



도시 블루스는 컨트리 블루스가 재즈의 영향을 수용함으로써 등장하게 된 것이다(Hitchcock 1974:189-196). 즉, 초기의 재즈 밴드(즉, 스윙 빅 밴드 이전의 재즈 밴드)처럼 반주용 콤보 밴드가 특징으로서, 시카고 블루스로 불렸을 정도로 시카고에서 가장 폭넓게 연주되었다. 콤보 밴드는 기존의 기타와 하모니카 반주에 피아노·베이스·드럼 등이 추가된 것이다(그러나 재즈밴드에서와 같은 관악기는 포함 안 됨). 가사 내용은 컨트리 블루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시 블루스에서는 보컬리스트의 대부분이 남성이며,23) 이들의 순회공연과 음반 등을 통해 유럽에도 블루스가 전파된다. 이 시기의 대표 주자로는 미시시피에서 1920년에 시카고로 이주한 빅 빌 브룬지(Big Bill Broonzy 1893-1958)와 시카고 스타일의 개척자로 불리는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1915-1983) 등 다수가 있다.


4. 1940년대: 점프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

1940년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점프 블루스(Jump Blues)와 뒤이은 리듬 앤 블루스(R&B)도 역시 재즈 밴드의 영향을 받아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1930년대부터 미국을 휩쓴 스윙 재즈 밴드(즉, 빅 밴드)의 영향으로서 대규모의 관악 섹션(색소폰[2개 또는 그 이상], 트럼펫, 트롬본, 클라리넷 등)이 콤보 밴드에 더해진 것이다.

점프 블루스는 재즈의 본고장인 뉴올리언스에서 등장한 것으로서, 그와 같은 커진 밴드 반주에 당시까지 유행하던 부기-우기의 강렬한 피아노 리듬이 접목된 것이 특징이다(즉, 뉴올리언스에서의 도시 블루스의 일종이다). 역동적인 라틴 리듬(특히 룸바[rumba] 비트: ♪♬♪♬󰁡)도 흔히 가미되었다.24) 즉, 점프 블루스도, 부기-우기처럼, 보컬리스트는 흔히 신나는 춤을 곁들이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점프 블루스의 창시자로 불리는 루이 조던(Louis Jordan 1908-1975, 보컬리스트/알토 색소폰과 클라리넷 주자)도 그의 음악을 ‘셔플 부기’(Shuffle Boogie) 또는 ‘점프 자이브’(Jump Jive) 같은 춤곡으로 불렀다(Charlton 1996:18-19).25)

R&B는 점프 블루스에 (가스펠의 영향으로) 강렬한 보컬리스트가 합세하면서 등장한 것이다(R&B는 초기에 점프 블루스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했다). R&B는 1940년대 중반부터 LA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는데(이후의 블루스를 총칭적으로 R&B라고도 부름), 블루스적 특징의 하나인 강한 백비트도 R&B에서 더 강해지고, 밴드에 일렉트릭 기타도 차차 합세한다. R&B란 명칭은 1949년에 음반판매 정보지인 빌보드(Billboard)에서 이 같은 새로운 음악에 대해 당시까지 흑인 음악에 대해 총체적으로 쓰이던 ‘레이스 음악’(Race Music: ‘인종 음악’)이란 용어 대신 제의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Sadie 2001:309). 이런 변화는 흑인 음반구매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늘어났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백인 밴드들을 중심으로 한 스윙 재즈가 유행하면서 흑인 스윙 재즈 주자들이나 블루스 주자들은 백인들의 클럽이나 극장 등에서 소외당하기 일쑤였다. R&B는 이런 아티스트들이 바(Bar)나 클럽 등에 ‘쥬크 박스’(Juke Box)의 설치가 확대되는 것에 착안하여 이러한 녹음음악으로 돌파구를 찾으면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흑인들이 경영하는 소규모의 음반회사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루이 조던은 점프 블루스뿐만 아니라 R&B의 아버지로도 불리는데, R&B는 차차 연주자들에 따라 상대적으로 열정적이거나 부드럽고 거칠거나 세련된 스타일 등을 특징으로 하는 다양성을 포괄하게 된다(Sadie 2001:734).26)


5. 1950년대: 모던 도시 블루스와 로큰롤

1950년대 초부터 유행하는 모던 도시 블루스는 도시 블루스에 일렉트릭 기타가 도입된 것을 말한다(그 기원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27) 그리고 1950년대 중반부터는 점프 블루스(또는 R&B)와 컨트리 음악의 결합으로 볼 수 있는 로큰롤(Rock & Roll: 어원은 성행위란 의미의 속된 표현)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블루스에서의 어쿠스틱 기타 반주는 소리가 작아 반주의 역할도 제한적인 것이었으나, 일렉트릭 기타의 도입은 블루스의 연주 스타일 자체가 바뀌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즉, 강렬하고 기교적인 일렉트릭 기타 솔로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는데, 음향을 더 크게 증폭시키기 위해 ‘피드백’(Feedback)을 비롯한 다양한 소리변조 기법도 차차 많이 사용된다(Naumann and Wagoner 1985:148-149).28)

모던 도시 블루스로서의 일렉트릭 블루스는, 30년대의 도시 블루스의 경우처럼, 역시 시카고 (일렉트릭) 블루스로 불리기도 했는데, 시카고와 그 외에 멤피스 등지에서도 활성화되며, 이후 로큰롤과 록 스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Charlton 1996:14-15). 대표 주자로는 시카고의 하울링 울프(Howlin' Wolf(본명은 Chester A. Burnett) 1910-1976)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본명은 Mckinley Morganfield) 1915-1983), 멤피스에서 활동한 비 비 킹(B. B. King(본명은 Riley B. King) 1925년 생) 등이 있다.

로큰롤은 블루스를 백인들이 변형시킨 것으로써, 점프 블루스(또는 R&B)를 빠른 버전으로 바꾸어 부르고 반주를 재즈식의 밴드 반주에서 컨트리 음악 식의 포크 기타와 홍키통크(통술집) 식의 피아노 반주(부기-우기도 그 한 예)로 대체하면서 탄생했다(Redd 1974; Hitchcock 1974:257-265). 그리고 컨트리 음악을 불러왔던 빌 헤일리(Bill Haley 1925-1981)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 등에 의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Szatmary 1997:1 이하).

로큰롤은 한 마디로 컨트리식의 반주가 붙은 빠른 댄스용 블루스이다. 로큰롤의 선율도 1940년대의 점프 블루스의 것과 유사하며, 다수의 로큰롤 음악이 블루스의 커버 버전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로큰롤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헤일리와 그의 그룹(Comets)의 <떨고 흔들고 굴러라>(Shake, Rattle and Roll, 1954)는 원래 R&B 보컬리스트인 빅 조 터너(Big Joe Turner 1911-1985)의 곡이었으며, <하루 종일 흔들어라>(Rock Around the Clock, 1955)는 12마디 패턴의 블루스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엘비스의 첫 히트곡인 1956년의 <사냥개>(Hound Dog: 100만장 이상의 음반이 판매됨)도 원래는 여성 보컬리스트인 빅 마마 손튼(Willie Mae “Big Mama” Thornton 1926-1984)이 불렀던 R&B였다. 그러나 로큰롤의 노랫말에 있어서는 R&B 또는 블루스에서의 흑인 속어와 대담한 성적 표현을 백인 십대들이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내용으로 바꾸었다.
로큰롤이 1950년대 후반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유행한데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한 견해는, 초기의 블루스와 흑인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듯이, 로큰롤은 청교도 정신에 의해 키워진 백인 10대들의 반항정신을 표출할 수 있는 강력한 공동체적인 수단이 되었다고 설명한다(권영성 1995:41). 이런 음악들은 특히 대중매체의 확산(자동차에도 라디오가 부착되기 시작)과 함께 사실 많은 젊은이들이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고, 당시의 부모들과 심각한 마찰을 겪기도 했다. 또 다른 견해는 이와 약간 유사한 점도 있기는 하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즉, 록과 그 시작인 로큰롤은 자유를 향한 무한한 동경의 낭만주의 사조가 20세기 중반에 통속적인 수준으로 부활한 것이라는 견해이다(Pattison 1987:138). 그 밖의 견해로는 로큰롤을 미국에서의 제2 혁명의 시작으로 간주한 경우도 있다(London 1984:10). 여기서 ‘혁명’이란 성적 억압과 전통적인 사고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은 문화산업 자체에 있어서도 그에 못지않은 큰 전환점이 된다. 미국에서는 1954년에 처음으로 공립학교에서 흑백의 구별을 없애도록 지시가 내려지는 등(그러나 모든 공립학교에서 곧바로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인종차별정책의 완화 과정에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50년대 초부터 R&B를 전문으로 방송하는 프로그램도 시작되었다(Szatmary 1997:22).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폭넓게 대중화된 TV에 흑인들을 출현시켜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까지는 아직 못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음반사업자 가운데 일부는 흑인적인 풍부한 감성의 음악(R&B 등)을 백인이 연주할 수만 있다면 TV의 출현은 물론이고 그 선전효과를 통해 특히 경제 성장으로 구매력이 커진 백인 10대를 상대로 엄청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성기완 1997:21).29) 이런 생각은 당시 로큰롤을 연주하기 시작하던 빌 헤일리와 엘비스 프레슬리 등을 발굴하여 스타로 등극시켰고, 음반산업도 엄청난 규모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결합인 로큰롤의 상징이다. 백인인 그는 블루스의 근원지인 미시시피 주에서 태어나 역시 블루스의 또 다른 중심지이면서 컨트리 음악도 성행했던 멤피스에서 활동을 했고, 그가 부른 여러 로큰롤들의 작곡가(Otis Blackwell 1931-2002)는 흑인이었다(Giddens 1995:346).30)

로큰롤은 프레슬리 등의 백인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지만, 그것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일부 흑인 주자들도 차차 명성을 날리며 스타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척 베리(Chuck Berry, 1926년 생)와 패츠 도미노(Fats Domino 1928년 생) 등). 그러나 흑인음악에 대한 원천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고 백인 10대들의 난폭하고 반항적인 행동이 그런 음악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한 기성세대들은 언론을 통해 분노에 찬 비판을 거듭하였고, 라디오 프로그림 진행자들이 뇌물을 받고 그런 음악을 틀어주었다는 혐의가 청문회(Payola Scandal, 1959-1960)까지 가게 되면서, 로큰롤 음악에 대한 유행이 주춤해진다(Charlton 1996:49). 그리고 이런 상황은 몇몇 로큰롤 주자들(버디 홀리(Buddy Holly 1936-1959) 등)의 교통사고나 비행기 사고 등에 의한 갑작스러운 죽음과 맞물려 그 열기는 마침내 진정된다.


6. 1960년대: 영국 R&B/블루스록과 미국의 R&B-소울

1960년대에는 그 동안 영국으로도 전파된 R&B/(모던) 도시 블루스가 백인 취향의 영국 R&B로 변모되고 로큰롤의 전파는 블루스록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영국 R&B/블루스록 그룹들이 미국 순회공연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에서도 비로소 블루스가 백인 청중을 위한 것으로 변모되고 결과적으로 블루스 리바이벌 붐까지 일어나게 된다(엄청난 이윤 창출을 예상하며 과거의 블루스 음반들도 재발매 됨).31) 반면, 인권운동의 절정기인 1960년대 후반(흑인들의 대 폭동(디트로이트, 1967)과 킹 목사 암살사건(1968))으로 가면서는 백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흑인 청중을 겨냥한 소울이 등장하면서 R&B에도 소울이 접목된다(R&B-소울: Eyerman and Jamison 1995:449-468).

영국에 블루스가 전파된 시기는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위의 II-3 참조), 이후 그곳에서는 주로 ‘선술집 밴드들’(Pub Blues Bands)에 의해 연주되면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백인적인 노랫말의 블루스들도 차차 등장하고(현실의 부조리와 그에 대한 반항 등), 1950년대에는 ‘스키플’(Skiffle)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Charlton 1996:86).32) 이와 같은 블루스와의 친숙한 배경이 50년대의 R&B/일렉트릭 블루스의 전수와 함께 영국적(백인적) R&B로의 발전에 터전이 된 것이다. 그리고 블루스록은 영국에서의 이와 같은 R&B의 유행으로 로큰롤에도 R&B의 끈끈한 감정적 표현이 접목되면서 탄생한 것이다. 블루스록에서는 일렉트릭 기타가 본격적인 솔로 악기로 등극하는 것도 중요한 특징인데, 영국 R&B 주자들 중 다수가 블루스록 주자이기도 하다(그리고 이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는 폭발적인 인기의 록그룹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영국 R&B/블루스록의 대표 주자로는 그 원조로 인정받는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 1928-1984, 보컬/기타리스트), 영국 블루스계의 대부인 존 메이얼(John Mayall 1933년 생, 보컬/기타리스트), 그리고 1962년에 결성된 3개의 5인조 그룹인 애니멀즈(Animals), 야드버즈(Yardbirds),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등이 있다(Charlton 1998: 93-113).33)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등장하는 소울은 R&B와 스타일 상으로 큰 차이점은 없다. 그러나 가스펠에서 유래된 격렬한 외침과 폭발성을 특징으로 하며, 도전적·정치적 노랫말도 등장한다.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음반사들은 각각 세부적으로 차별화된 스타일(열정적이거나 부드러운 소울 등)을 추구했는데, 60년대 말부터는 상업적인 춤음악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받게 된다.34)


7. 1970년대: 다양한 퓨전 블루스

1970년대는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블루스가 자유롭게 백인 청중 앞에서 연주된 시대이다. 블루스록과 모던 도시 블루스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블루스들도 옥외 콘서트 장은 물론이고 대학 등에서도 초청 연주되었고,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Sadie 2001:735). 그러나 이와 같이 눈에 띄는 행사들 외에, 블루스 자체는 사실 그 어느 때보다도 활성화되지 못한 편이었다. 그 대표적인 이유는 블루스의 대표적인 노장들이 이 시기에 다수 사망함으로써 세대교체가 불가피 했던 반면 정작 정통 블루스를 이어나갈 소장파는 찾기 어려울 정도였고,35) 다른 한편으로는 보컬 대신 일렉트릭 기타의 엄청난 기교와 드럼이 밴드를 리드하며 전자적으로 증폭된 ‘헤비 사운드’를 특징으로 하는 록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록은 그 뿌리인 로큰롤과 블루스록으로부터 멀어지며 다양하게 가지를 벌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하드록, 포크록, 애시드록, 소프트록 등: Hitchcock 1774:82). 결과적으로 록 이전에 속하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블루스들은 다른 여러 대중음악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흡수하며 주변적으로 존속된다. 물론 이런 상황은 블루스 발전의 초기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경향이 증폭되는 70년대(와 그 이후)에는 더욱 심화된다(양효실 2003:135-150). 그리고 블루스 밴드의 경우에는, 1960년대의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이 백인들로 이루어지게 된다.

컨트리 블루스 주자들 가운데는 여기에 R&B(이후에는 레게) 등을 접목한 타지마할(Taj Mahal(본명은 Henry Saint C. Fredericks) 1942년 생)을 꼽을 수 있다(Ward 1992:586-593).36) 일렉트릭 블루스 주자나 블루스록 그룹 가운데는 록큰롤, 재즈, 사이키델릭 사운드 효과 등도 가미한 6인조의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Paul Butterfield Blues Band, 60년대 중반에 결성됨), 소울과 컨트리 블루스적 요소를 융합한 6인조의 ‘올먼 브라더스 밴드’(The Allman Brothers Band, 1968년 결성), 저그 밴드 스타일의 시골 블루스 밴드로 출발했고 부기-우기 등을 결합시킨 6인조의 ‘캔드 히트’(Canned Heat, 1966년 결성), 훵크 스타일을 가미한 하모니카 주자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e 1951-1996) 등이 있다(Charlton 1996:106-110, 156-159).37)


8. 1980년대: 어번 [컨템포러리]와 뉴 잭 스윙

1980년대는 레이건 정부(1981-1988)의 신보수주의 정치·경제정책이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며 사회적・문화적으로도 복고풍의 분위기가 주류를 이룬다. 음악분야에서는 1982년에 혁신적인 디지털 방식의 CD(Compact Disc)가 선을 보인 이후 과거의 LP음반들이 CD로 다수 재발매된 것도 한 몫을 했다. 이런 배경과 함께, 대중음악은 부유층을 위한 세련되고 가벼운 감상용 음악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보수주의 정책 하에서의 흑인들의 생활은 흑인과 빈민 보조금의 대폭적 삭감 등으로 인해 날로 악화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거리 문화로 성장하는 것이 힙합(Hip Hop)인데(McDonnell 1992:89-90),38) 레이건 정부의 퇴임시기와 맞물려 이와 같은 길거리 스타일도 대중음악의 다른 장르로 흡수되기 시작한다.

앞의 두 흐름 가운데 전자와 관련된 1980년대의 블루스 스타일은 흑인적인 뉘앙스가 많이 희석된 말쑥하고 세련된 것으로서, ‘어번’(Urban) 또는 ‘어번 컨템포러리’(Urban Contemporary)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Urban," at www.allmusic.com). ‘어번’은 소울적인 보컬과 훵키(funky)한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R&B-소울에 팝적인 요소를 가미시킨 퓨전의 일종인데, 흔히 팝 음악으로도 분류될 정도이고 보컬리스트들 중 다수가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게 된다.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해온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년 생), 가스펠적 배경(모친이 가스펠 보컬리스트)과 강력한 가창력이 특징인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1963년 생), 탄력적인 저음의 보컬이 특징인 토니 브랙스턴(Toni Braxton 1967년 생), 달콤한 발라드적인 음색의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 1969년 생) 등 다수가 여기에 속한다.

‘어번’의 기원은 적어도 1960년대의 보컬리스트이며 피아니스트인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1950년 생)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1969) 등). 당시 그는 디트로이트의 매우 상업적인 음반 레이블인 모타운(Motown, 1962년 설립)의 대표 주자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 음반사의 정책은 백인적인 팝 스타일을 결합하여 백인들의 취향에도 어필하도록 주력하는 것이었다. 이런 경향이 1980년대에는 지배적인 경향으로 성장한 것으로서, 음반판매 수익도 크게 증가되었다(Garofalo 1994:285-287).
1980년대 말에는 ‘어번’에 힙합도 접목되어 빠른 비트와 랩(흔히 외설적・체제비판적・폭력적이다), 샘플링(기존 음향의 전자적 발췌) 기법 등도 도입되기 시작한다(보수주의 성향과 권위에 대한 반항적 뉘앙스를 보여준다: ).39) 이와 같은 음악은 ‘어번’과 구별하여 ‘뉴 잭 스윙’(New Jack Swing)으로 불리게 되는데, 바비 브라운(Bobby Brown, 1969년 생)의 (MCA, 1988) 등의 유행으로 급부상하게 된다("New Jack Swing," at www.allmusic.com).


9. 1990년대〜현재: 블루스 리바이벌과 70〜80년대 경향의 가속화

1990년대의 블루스에 대한 현상으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19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과거의 음반들이 CD로 재발매 됨에 따라 블루스의 뿌리인 컨트리 블루스까지 세계적으로 폭넓게 전파되고 결과적으로는 (일시적이기는 하나) 블루스 노장들의 공연도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새로운 스타일이 부재한 가운데 1970〜1980년대의 경향이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블루스만이 아니라 음악 전반에 걸친 특징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적어도 197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양효실 2003:135-150).

블루스 리바이벌로 각광을 받은 노장들로는 오랜 경력으로 그의 음악 자체가 블루스 음악의 역사인 윌리 딕슨(Willie Dixon 1915-1992: Dixon and Snowden 1990), 컨트리 블루스를 평생 고수한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 1917-2001), 그리고 50여년의 경력과 명성의 일렉트릭 블루스 주자 비 비 킹 등이 있다(Charlton 1996:108-110).40)

1970〜1980년대 경향의 가속화로서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요소들이 결합된 퓨전적 블루스, 힙합의 주류로의 편입과 병행된 뉴 잭 스윙의 부상, 여전한 어번의 유행과 함께 유사한 스타일의 ‘컨템포러리 R&B’의 유행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90년대 퓨전적 블루스의 극단적인 예로는 4인조 밴드인 ‘레일로드 저크’(Railroad Jerk, 1989년 결성)의 연주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연주는 R&B, 재즈, 레게, 델타 블루스, 전자음향적 소음(Electronic Noise) 등 수많은 음악적 스타일을 결합/혼합한 것으로서 스타일의 분류 자체가 별 의미가 없을 정도이다(1990년대의 일렉트릭 블루스로 분류될 수는 있다).41)

1980년대 말에 등장한 뉴 잭 스윙은, 힙합이 1980년대 후반〜1990년대에 걸쳐 엄청난 비판과 찬사 사이의 극단을 오가며 주류로 부상하는 것에 발맞추어, 차차 세력을 넓혀왔다(Rose 1994:19; Potter 1995:108).42) 그 밖에, 199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지게 유행하는 ‘컨템포러리 R&B’는 ‘어번’처럼 역시 팝적인 요소가 가미된 부드러운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Contemporary R&B," at www.allmusic.com). ‘어번’이 소울적인 뉘앙스를 많이 잃은 것에 대해, 컨템포러리 R&B는 그런 특징이 다시 상대적으로 더 가미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스타일 상의 구별이 잘 안되는 경우도 많으며, 두 카테고리에 모두 속하는 아티스트들도 많다.43) 그리고, 이 두 스타일은 근본적으로 리듬보다는 선율에 기호가 있는 계층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두 스타일에 랩을 포함한 힙합적인 요소도 차차 가미됨에 따라 뉴 잭 스윙과의 구별이 힘든 상태의 음악까지 나타나게 된다.44)



III. 맺음말

단순한 형식적・화성적 틀을 바탕으로 한 즉흥연주 방식의 블루스는 서양음악적 측면에서 보면 뭔가 대단히 부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직설적인 가사와 함께 직접적 감정소통을 위한 강렬한 표현 기법은 상스럽고 위험하게까지 여겨졌던 것이다.그러나 오히려 그 단순한 틀은 블루스가 시대적 변천에 따른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도록 확장과 변형을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얼마나 긴 즉흥적 간주가 삽입 되든지, 화성이 얼마나 복잡하게 덧씌워지거나 더 단순해지든지, 반주악기가 하나에 불과하거나 밴드가 되든지 간에 현재까지도 그 틀은 유효하다.

그리고 블루스에서의 상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표현력은 미국에 끌려온 흑인들의 후예들이 인간 이하의 괴로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들 외에 그토록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가사를 그토록 감성적인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블루스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서구화되었던 재즈와 거의 같은 시기(1910년대 후반)에 미국 대중음악문화산업의 오락물로 편입되기 시작했지만, 그 표현력은 이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적인 저항의식을 표출하는 데도 한 몫을 했다. 이러한 역할은 블루스가 재즈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흑인적인 것으로 천대를 받았고 또한 가사를 통해 소통이 더 직접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블루스의 하위 장르로 출발한 로큰롤과 블루스 록/록은 물론이고 1960년대의 소울이나 1980년대의 힙합도 마음을 뒤흔드는 강한 힘의 블루스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저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음악과 문화 제12호

블루스의 역사는 문화산업에 의한 성장과정만으로도 설명될 수는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시도했듯이, 그것이 성장해온 사회적 맥락과 그에 따른 스타일의 변천을 같이 고려해야만 그 의미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블루스가 극단적인 퓨전의 형태를 보이는 것처럼, 이제는 더 이상 흑인과 백인의 대중음악 사이에는 차이점이 거의 없어져버린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블루스는 --재즈처럼-- 원래 출발부터 본질적으로 흑인음악이 아닌 다인종의 것이었다는 주장을 내놓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Tagg 1989:295).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누가 백인이고 누가 흑인인지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표현력과 창법에서 차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미국의 백인 아티스트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표현력과 창법을 열심히 학습・모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는 새로운 스타일의 부재가 포스트 모더니즘적 현상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새로운 시대적・감성적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노래 스타일을 만든 사람들이 미래에 나타난다면, 그 주인공은 역시 그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검색어: 블루스, 부기우기, 점프 블루스, R&B, 로큰롤, 어번


<미주>

1)재즈는 기악음악으로서 어느 정도 음악직업교육을 받거나 접할 수 있었던 흑인주자들이 연주했던 것인데 반해, 블루스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최하급의 흑인 계층에서 유래한 것이다.
 
2)흑인들의 그와 같은 창법은 1867년에 이미 흑인 특유의 것으로서 언급한 글이 남아 있다.
 
3)대표적 작곡가로는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1898-1937),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1900-1990),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 1910-1981) 등을 들 수 있다.
 
4)최근에 다시 발매된 노동요 음반으로는 (Bob Carlin, 1996[rep. of 1941]) 등이 있다.
 
5)남북 전쟁(1861-1865) 이전의 민스트럴 쇼에서는 얼굴을 검게 칠한 백인 민스트럴들이 흑인들의 노래·춤을 바보스럽게 묘사하는 부분에서 불렸지만, 그 이후에는 흑인들이 무대에서 그와 같은 노래로 역시 백인 청중들을 위한 쇼를 하게 되었다. 초기 블루스의 전문적 보컬리스트들도 흔히 민스트럴 출신이 많았는데, 무대 위에서의 경험은 전문적 엔터테이너로서의 출발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6)가스펠 송의 유명한 작곡가로는 토마스 도시(Rev. Thomas Dorsey, 1899-1993), 로버타 마틴(Roberta Martin, 1907-1969) 등이 있고, 대표적인 보컬리스트로는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 1911-1972) 등이 있다. 그녀가 1947년에 녹음한 는 200백만 장 이상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도 널리 알려진 곡).
 
7)이와 같이 병의 목을 이용했기 때문에 ‘보틀넥 기타 스타일’(Bottle-neck Guitar Style)로도 불린다. 그리고 그런 도구들이 프렛 역할을 한 것이다. 즉, 개방현만으로도 하나의 코드를 연주할 수 있게 한 것인데, 이런 목적을 위해 현의 조율이 임의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8)초기에는 8, 10, 16마디의 형태의 블루스도 나타났는데, 이런 사실에 대해 일부 블루스 학자들은 블루스가 영국의 발라드(유행가) 형태를 본받은 것으로 본다.
 
9)블루스의 12마디 틀에 약간의 변형이 가미된 예로는 첫 4마디가 8마디로 확장된 것, 또는 이 뒤에 또다시 ‘즉흥적인 패시지’(“Breaks”, 또는 “Stop Time”)가 삽입되고 그 다음에 나머지의 8마디가 오는 형태, 그 외에 12마디 패턴의 끝에 4마디 정도가 장식적으로 덧붙여져 있는 형태 등을 들 수 있다.
 
10)블루 노트의 사용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프리카에서는 반음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장음계에서도 3도음과 7도음을 약간 낮춤으로써 반음을 피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로는 아프리카 말의 억양과 관련하여 발전되었다는 설도 있다.
 
11)셔플은 원래 흑인 춤곡의 한 종류 또는 그 리듬을 말한다. 춤곡으로서의 셔플은 8비트이고 음가가 서로 같지 않은 리듬(즉, 길고 짧은 형태)으로 되어 있어 스윙감을 준다. 이와 같은 형태의 리듬을 셔플 비트라고 하는데, 블루스 리듬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12)코넷(Cornet)은 트럼펫과 매우 유사하게 생긴 고음 금관악기로 음색도 비슷하다.
 
13)그는 교사가 된 해에 1893년에 현악4중주단(Lauzetta Quartet)을 결성하여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 참가하는가 하면, 1896년에는 민스트럴 쇼 그룹(Mahara's Minstrels)을 결성하여 3년간 (서부로는 오클라호마까지, 남부로는 쿠바까지) 유랑하며 쇼 사업을 벌리기도 했다. 귀향해서는 다시 2년간 교사생활을 하며(1900-1902) 학교 밴드를 창설하고, 이후에는 미시시피 주(클락스데일[Clarksdale])로 이주해서 흑인 밴드(Colored Knights of Pythias)의 리더로서 백인과 흑인 청중을 상대로 6년간 연주활동을 했다.
 
14)출판된 핸디의 블루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멤피스 블루스>(Memphis Blues, 1912), <세인트루이스 블루스>(St. Louis Blues, 1914), (1914)가 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원래 (1909)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던 것인데, 3년 후 가사와 제목을 바꾸어(작사자는 George Norton) 재출판한 것이다. 그리고 위의 도 2년 후인 1916년에는 로 개명되어 재출판 되었다.
 
15)1920년대에는 이미 핸디가 블루스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Father of the Blues》(DRG, 1923). 최근에 재발매된 그의 음반으로는 《W. C. Handy's Memphis Blues Band》(Memphis Archives, 1994) 등이 있다. 그리고 ‘W. C. 핸디 블루스 상’(W. C. Handy Blues Awards)은 1979년에 발족된 이후 블루스에서의 가장 영예스러운 상으로 존속되어 왔다.
 
16)아틀란타의 경우에는 윌리 맥텔(Willie McTell 1901-1959), 블라인드 블레이크(Blind Blake 1890년대 초-1933), 소니 테리(Sony Terry 1911-1986) 등의 대표주자들이 모두 한 쪽 또는 양쪽 눈을 잃었다.
 
17)이 블루스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I was born on the 13th, I'm my mother's only son(반복),
Out of all the money in the world, I swear I ain't had none.
 
I'm the unlucky one, no matter how I try(반복),
I took the plane for California, landed in Shanghai.
 
I have no schooling, I'm just another fool in town(반복),
The first day I started to school, the sucker, it burnt down.
 
18)블라인드 레몬 제퍼슨의 대표적 음반으로는 《Blind Lemon Jefferson》(Milestone, 1992) 등이 있으며, 이 음반 가운데에서는 “See That My Grave Is Kept Clean”, “Matchbox Blues” 등이 대표곡이다.
 
19)멤피스 저그 밴드의 블루스 음반으로는《Memphis Jug Band》(Yazoo, 1990) 등이 있는데, 이 음반은 1927-1934년의 연주곡을 모아 재발매한 것이다.
 
20)부기-우기는 1920년대의 캔자스시티가 진원지이고 곧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주 등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원지가 세인트루이스 등지로 주장되기도 한다.
  
21)부기-우기는 1927년에 처음으로 녹음되었다: 미드 럭스 루이스(Meade Lux Lewis, 1905-1964)의 . 가장 유명한 곡은 파인 탑 스미스(Clarence 'Pine Top' Smith, 1904-1929)의 (1928)인데, 부기-우기가 제목으로 처음 등장한 곡이기도 하다. 부기-우기의 아버지라 불린 지미 얜시(Jummy Yancey: 1894-1951)는 1939년에야 처음 음반을 내게 된다. 부기-우기는 스윙 재즈 오케스트라의 리더였던 토미 도시에 의해 1938년부터는 밴드음악으로도 널리 유행하게 된다.
 
22)부기-우기가 부분적으로 랙타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부기-우기는 훨씬 덜 서구적이고, 주자들도, 랙타임 피아니스트들과는 달리, 대부분이 교육을 받지 못해 악보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23)W.C.핸디가 일찌감치 활동했던 멤피스에서는 예외적으로 여성 블루스 주자가 크게 성공했다.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멤피스 미니(Memphis Minnie 1897- 1973)가 그 예인데, 뉴올리언스 태생으로서 1930년대부터 시카고의 도시 블루스 스타일에 가까워졌다. 《Queen of the Blues》(Columbia-Legacy, 1997): 등이 대표곡.
 
24)점프 블루스 음반으로는 1992년에 재발매된 《Blues Master, Vol.5: Jump Blues Classics》(Rhino) 등이 있다.
 
25)셔플은 각주 11 참조. 자이브는 지터벅(Jitterbug: 스윙 시대에 유행했던 미국 사교춤의 하나)에서 진화된 것으로서, 1939년경부터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American Swing이라고도 한다).
 
26)다수의 도시 블루스, 점프 블루스, 일렉트릭 블루스주자들도 R&B를 연주했다. 루이 조던 외에 점프 블루스 주자인 패츠 도미노(Fats Domino 1928년 생, 보컬/피아니스트), 부기-우기 블루스로 출발한 보컬리스트 빅 조 터너(Big Joe Turner 1911-1985), 도시 블루스의 기타리스트로 출발한 로웰 풀슨(Lowell Fulson 1921-1999), 도시 블루스와 이후의 거의 모든 블루스를 연주한 B. B. 킹(본명: Riley B. King 1925-2004)과 앨버트 킹(Albert King 1923-1992) 등이 그 예이다. 다른 한편으로, R&B 주자의 음악 중에는 팝 차트를 오른 것들도 다수 있으며, 팝 음악 가운데 R&B 차트에 오른 것들도 있다.
 
27)일렉트릭 기타는 악기의 몸통이 있는 것(일렉트로-어쿠스틱 기타: Electro-acoustic Guitar)과 몸통이 없는 것(또는 솔리드-바디 기타: Solid-body Guitar)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1930년대부터 선보인 바 있으며, 후자는 1948년에 발매되었다.
 
28)‘피드백’은 입력 장치인 마이크를 출력장치인 스피커 앞에 놓아, 출력된 음향의 일부가 다시 입력 장치에 흡수되어 만들어지는 거친 음향을 의미한다.
 
29)예를 들면, 엘비스 프레슬리를 발굴한 프로듀서 샘 필립스(Sam Phillips 1923-2003)의 생각도 그랬다.
 
30)오티스 블랙웰이 엘비스에게 준 곡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 등이 있다.
 
31)1960년대의 블루스 리바이벌은 제2차 대전 이후 많이 나타난 음반 레이블들(흑인 소유의 레이블들도 포함됨) 뿐만 아니라 테이프 리코더의 출현도 큰 몫을 했다.
 
32)스키플은 원래 193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아파트를 임대했을 때 벌리던 축하파티용의 거친 음악으로서, 노래와 더불어 기타와 하모니카 같은 악기가 동원되었고, 그 외에 빨래판, 줄을 매단 양동이, 물병 등도 악기 대용으로 흔히 쓰였다.
 
33)알렉시스 코너는 ‘블루스 인코포레이티드’(Blues Incorporated, 1961년 결성), 존 메이얼은 ‘블루스브레이커스’(Bluesbreakers, 1962년 결성)를 통해 많은 블루스들을 커버 버전으로 연주한 바 있고, 또한 많은 블루스 주자들이 일시적으로 거쳐 갔다. 애니멀즈(1983년까지 활동: 키보드, 보컬, 베이스, 드럼, 리드 기타)는 영국의 R&B/블루스록 그룹 가운데 가장 먼저 미국에 상륙했으며, 최대의 성공작인 (1964)은 원래 무명의 블루스 주자(존 화이트 John White)의 곡이다. 야드버즈(2개의 리드 기타, 보컬, 드럼, 베이스)는 리드 기타의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1945년생)의 주도 아래 블루스 밴드로 결성된 것인데, 1965년에 클랩튼이 떠난 후에는 록 스타일로 접근했다.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롤링 스톤즈(보컬, 베이스, 드럼, 리드 기타, 리듬 기타)는 최장수 밴드의 기록을 갖고 있다.
 
34)대표적인 음반 레이블로는 뉴욕의 애틀랜틱(Atlantic), 디트로이트의 모타운(Motown), 시카고의 오케이(Okeh), 멤피스의 스택스(Stax), 필라델피아의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Philadelphia International)이 있다. 소울계의 대부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1933년 생: 특히 도전적인 노랫말로 유명)이며, 같은 성향의 소울 그룹으로는 <슬라이 &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1968년 결성된 7인조 보컬그룹) 등이 있다.
 
35)블루스의 거장들 가운데 3명의 “킹”들(별명)이 남아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앨버트 킹, 프레디 킹(Freddy[Freddie] King 1934-1976), B. B. 킹.
 
36)타지마할(보컬/기타/피아노 주자)은 뉴욕 태생이지만 흑인으로서 컨트리 블루스와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해왔는데, 70년대부터는 실험적인 블루스로도 관심을 확대하여 다양한 요소를 가미시켰다. 좀더 정통적인 컨트리 블루스 주자로는 여성들인 로리 블록(Rory Block 1949년 생)과 보니 래트(Bonnie Raitt 1949년 생, 특히 초기 곡들) 등이 있다(후자는 록·팝·발라드 가수로도 활동해 왔다). 레게는 자메이카에서 민속음악, 재즈, 아프리카와 남미의 춤곡 리듬, 뉴올리언즈의 점프 블루스 등이 결합되어 1960년대부터 등장한 것이다(50년대의 스카[Ska]에서 유래). 4비트 패턴의 느린 베이스에서 첫째와 셋째 비트, 그리고 애프터비트에 강한 액센트가 주어져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37)폴 버터필드(1942-1987)는 백인 하모니카 주자/보컬리스트이다. 사이키델릭 사운드(Psychedelic Sound)는 환각을 체험(히피문화)하는 듯한 분위기의 음향을 말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에 걸친 미국 웨스트코스트의 록에 적용시키는 경우가 많다. Alan Bisbort and Parke Puterbaugh, Rhino's Psychedelic Trip(San Francisco: Miller Freeman Books, 2000), pp.30-33 참조. 올먼 브라더스 밴드는 듀앤 올먼(Duane Allman 1946-1971)과 그렉 올먼(Gregg Allman 1947년 생) 형제를 주축으로 한 6인조 그룹(2 리드 기타가 특색)인데, 멤버들의 사망으로 1972년부터 쇠퇴했다. 훵크는 원시적인 R&B 또는 흑인적인 로큰롤로 볼 수 있는 것으로서(1960년대 말∼70년대에 유행), 선율적인 변주가 거의 없는 반복적 패턴의 보컬(성적인 기성이 흔히 포함됨)과 역시 베이스의 반복적인 리듬 패턴이 특징적이다.
 
38)힙합은 1970년대 말에 뉴욕 할렘가에서 등장해서 1980년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자유롭고 즉흥적인 패션・댄스・음악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 시작은 뉴욕의 클럽 DJ들이 자메이카 DJ들의 테크닉(기존의 트랙에서 리듬 파트만을 남긴 채 여러 가지 사운드 이펙트를 덧씌우는 것 등)을 본받아 소울과 훵크의 곡 등을 샘플랭한 후 이것을 반주삼아 즉흥적으로 ‘사설’을 빠르고 다이나믹하게 쏟아놓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39)대중음악에서는 전자음악의 영향으로 1980년대부터 '일렉트로닉‘ 테크놀러지를 활용한 기법도 도입되기 시작하는데, 샘플링이 가장 기본적이고 또 널리 애용된 것 중의 하나이다. 힙합음악의 등장 자체도 그와 같은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다(각주 38 참조).
 
40)존 리 후커의 재발매 음반들로는 《The Ultimate Collection: 1948-1990》(Rhino, 1991)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는 다양한 블루스/블루스록 주자들과 조인트로 연주한 곡들도 포함되어 있다. B. B. 킹은 가스펠적 뿌리의 도시적 보컬을 구사하며 모던 블루스 기타 스타일(싱글-스트링 주법)을 확립한 인물인데, 서정적이면서도 표현적인 그의 기타 솔로 스타일은 에릭 클랩튼을 비롯한 많은 블루스/블루스록 주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 재발매 음반으로는 《Spotlight On Lucille》(Virgin, 1992) 등이 있다.
 
41)레일로드 저크의 음반으로는《One Track Mind》(Metador, 1995), 《Third Rail》(Matador, 1996) 등을 들 수 있다. 이 밴드와 유사한 다른 그룹들로는 1990년에 결성된 3인조의 ‘더 존 스펜서 블루스 익스플러전’(The Jon Spencer Blues Explosion)과 1994년에 결성된 4인조의 ‘스켈리턴 키’(Skeleton Key: 1999년에 비행기 사고로 멤버 중 2명이 사망) 등이 있다.
 
42)힙합은 특히 랩의 외설적, 반권위적 가사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검열의 주요한 표적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힙합이 동시대의 흑인 대중문화를 이끌만한 훌륭한 지적・영적 매체라는 찬사 등도 다수 대두된 바 있다.
 
43)두 부류에 모두 속하는 대표주자로는 메이시 그레이(Macy Gray 1970년 생) 등 다수가 있다. 그녀는 사실 그 두 부류 만이 아니라 힙합과 라틴리듬 등도 도입하는 다양한 ‘크로스오버’를 시도하며, 소울 자체의 부활(Neo-Soul)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녀의 대표 음반으로는 《I Try》(Epic, 1999)와 《On How Life Is》(Epic, 1999) 등이 있다.
 
44)이와 같은 상태는 메이시 그레이(각주 43 참조) 외에도, 로린 힐(Lauryn Hill 1975년 생: 레게 등도 결합)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음악에서 나타난다. 그녀의 대표적 음반으로는 《Doo Wop (That Thing)》(Sony, 199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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