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꼬를 목욕시키고 있는 어머니
언제 보아도 그의 사진은 완벽한 구도이며 찬란한 영상, 영원히 기억될 걸작으로 존재하고 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깊은 숨결과 섬세함, 그리고 정성과 자애로움의 사랑이 깃들인 대서사시를 느끼게 해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숨이 막힐 지경으로 몰아 넣는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깊은 숨결과 섬세함, 그리고 정성과 자애로움의 사랑이 깃들인 대서사시를 느끼게 해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숨이 막힐 지경으로 몰아 넣는다.
"주민 대부분이 수은 중독으로 신체 장애를 일으켜 서서히 죽어 가는 모습을 기록한 유진 스미스의 이 사진은 우리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고뇌를 기록했으며, 어머니 무릅위에서 온몸을 비틀며 빈사상태에 있는 딸은 현대 각본연출법(Dramatugy)의 참된 주제로서 탐구된 페스트의 희생자가 넘치는 세계를 찍은 한 장의 피에타(Pieta :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를 무릅에 안고 있는 그림상)이다." 라고 이 사진에 대해 수잔손탁(미국의 평론가)은 격찬한 바 있다.
유진 스미스는 1971년 뉴욕에서 자신의 회고전을 열고 일본계 미국인 여자 미쇼코와 결혼, 그 전시회를 일본까지 와서 하며 3년간 공해에 노출된 사람들의 신경장애, 기형아 출산, 죽음의 고통등 '미나마타'병을 취재하게 되었다.
그는 미나마타 병의 원인이 되는 신일본질소공장으로 주민들이 몰려가 항의하는 장면을 취재하다가 공장 직원들의 폭행으로 눈과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의사는 실명 위험까지 경고했으나 그는 산업공해를 종식시키기 위한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의식으로 끝까지 사진을 찍었다.
그는 미나마타 병의 원인이 되는 신일본질소공장으로 주민들이 몰려가 항의하는 장면을 취재하다가 공장 직원들의 폭행으로 눈과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의사는 실명 위험까지 경고했으나 그는 산업공해를 종식시키기 위한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의식으로 끝까지 사진을 찍었다.
유진 스미스 (W. Eugene Smith, 1918~1978)
어머니 품에 안겨 목욕하는 주인공 도모꼬는 태어나면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고 보행은 커녕 식사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식물인간으로, 사진집이 나오고 나서 4년후인 1976년 21세 때 급성 페렴으로 죽었다.
미나마타병을 유진스미스보다 무려 10년 전부터 사진기자의 역사적 책임을 느끼고 기록해 왔던 일본인 구와바라 시세이가 뒤늦게 기록을 시작한 유진 스미스의 사진에 대해 평가한 말은 주목할 만했다.
"나는 유진 스미스가 미나마타에서 어떤 영상을 잡아 낼까 하는 기대와 함께 일말의 긴장감을 느끼며 그의 사진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미스가 잡지에 발표한 도모꼬와 어머니의 목욕하는 사진을 목격한 순간 나는 전율했다. 패배한 것이다.
일본인 작가로서는 찍을 수 없는 사진을 그는 찍어 내었다. 외국인이 아니고서는 찍을 수 없었던 카메라 워크,
이것이 바로 신선한 발상에 의해 찍혀진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충격이었다."
미나마타병을 가져다 준 도모꼬의 고향 고키시마의 공장은 일제시대(1928-1945)에 18년간 한국의 흥남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화학공장으로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있던 회사였다.
자신의 친아들과 유진스미스의 많은 걸작 사진 중에 하나인 오누이 사진은 딸을 촬영한 사진이다.
종군 기자로 2차 대전에 참여 하였다가, 눈과 전신에 많은 부상을 입고 퇴원 후의 사진으로 , 다시는 사진을 못 할지 모른다는 강박 관념을 이겨내고 시작한 첫 사진이다.
1950년 그는 스페인에 들러 대상을 결정하기 위해 두달 동안 약 만 킬로미터 정도를 돌아다닌 후에 특별히 델레이토사(Deleitosa)라는 마을에 마음이 끌렸다.
마을 주민들의 인물사진이 풍겨 주는 거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스페인의 마을>은 르포르타쥬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준다.
1944년 태평양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한층 더 치열해져가고 있을때 일본군은 가장 중요한 거점인 사이판의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크고 작은 동굴들을 요새지로 무장하여 생활하였는데 이 사이판이 1944년 7월 7일에 미군의 맹공 앞에 완전히 함락되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이때 촬영된 것으로서 미군의 화염병사기가 내뿜은 화염으로 인하여 초토화된 사이판의 한 동굴에서 수백명의 일본군 병사들과 민간인들의 시체들 가운데 유일하게 숨결이 살아있는 작은 생명체가 미군 병사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어 구출된 순간이었다.
유진스미드의 <유일한 생존자>는 제2차세계대전을 찍은 수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사진이라고 평해졌는데 비록 전쟁이 서로를 살상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지만 그 속에서도 어린 생명을 소중히하는 군인의 모습은
역설적이면서도 또한 진한 인간애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유진스미드의 <유일한 생존자>는 제2차세계대전을 찍은 수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사진이라고 평해졌는데 비록 전쟁이 서로를 살상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지만 그 속에서도 어린 생명을 소중히하는 군인의 모습은
역설적이면서도 또한 진한 인간애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미스는 당대의 가장 훌륭한 보도사진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이때의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세 살이었다.
1941년 11월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을 때 스미스는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정보와,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한 수많은 보도 사진들을 제공했다
그는 보도사진가로서 정말 외곬으로 한 길만을 철저히 헤쳐 나간 사진가였다.
그의 인간성은 고집불통이라고 소문이 날만큼 눈꼽만치도 남과 타협하지 않는 대꼬챙이같은 성미였다.
그는 편안하고 수월하게 지나칠 수 있는 일마저 빡빡하고 힘겹게 인생을 살았다.
보통 시비의 발단은 모두가 편집자와의 충돌이었다.
<라이프>와의 결별은 아프리카 슈바이처 박사를 놓고 그 사진들에 대한 편집인의 선별과 트리밍, 레이아웃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의 인간성은 고집불통이라고 소문이 날만큼 눈꼽만치도 남과 타협하지 않는 대꼬챙이같은 성미였다.
그는 편안하고 수월하게 지나칠 수 있는 일마저 빡빡하고 힘겹게 인생을 살았다.
보통 시비의 발단은 모두가 편집자와의 충돌이었다.
<라이프>와의 결별은 아프리카 슈바이처 박사를 놓고 그 사진들에 대한 편집인의 선별과 트리밍, 레이아웃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피와 땀을 온통 쏟아서 찍은 사진을 의도와는 달리 제멋대로 편집하는 데서 그는 항상 심사가 뒤틀렸다.
1918년 미국 캔자스주에서 태어나 사진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노틀담대학에 (1936) 입학했으나 1년만에 그만두고 뉴욕으로 나와서 18세의 어린나이로 <라이프>지의 기자가 되었다. <라이프>의 계약사진가로(1944) 태평양 전투지역을 종군하면서 부상, 매그넘 회원 탈퇴 등 한 직장에 오래 못 있고 수시로 옮겨다녔다.
그는 돈을 벌려고 인생을 구차하게 살지 않았다. 그의 모든 사진은 인류애가 바탕에 깔린 사랑이었다.
사진으로 인류에 기여하려는 욕망으로 정말 뜨겁고 정력적으로 자신의 삶과 예술에 전력투구한 작가였다.
노틀담대학에 (1936) 입학했으나 1년만에 그만두고 뉴욕으로 나와서 18세의 어린나이로 <라이프>지의 기자가 되었다. <라이프>의 계약사진가로(1944) 태평양 전투지역을 종군하면서 부상, 매그넘 회원 탈퇴 등 한 직장에 오래 못 있고 수시로 옮겨다녔다.
그는 돈을 벌려고 인생을 구차하게 살지 않았다. 그의 모든 사진은 인류애가 바탕에 깔린 사랑이었다.
사진으로 인류에 기여하려는 욕망으로 정말 뜨겁고 정력적으로 자신의 삶과 예술에 전력투구한 작가였다.
애리조나 주의 사진센터(Creative Photography Center)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거주하다가 60세의 나이로 1978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
유진 스미스
“사진이란 기껏해야 하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또는 여러 장의 사진이 이루는 전체적인 조화가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여 지각으로 매개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어떤 사진들은 그것들이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이나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성의 소리를 듣게 만들고, 이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며, 때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찾아내도록 인도해 갈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생활방식이 그들에게 낯설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와 연민을 느낄 것이다.
사진은 하나의 작은 목소리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진은 잘 구성하기만 하면 그 소리를 들려줄 수가 있다.”
'Documentary Photogra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JAMES NACHTWEY (0) | 2007.04.04 |
---|---|
James Nachtwey (USA,1948 - ) (2) | 2007.03.08 |
사진작가 최민식 (8) | 2007.01.26 |
Robert Capa / 로버트 카파의 사진과 삶 (0) | 2007.01.25 |
퓰리쳐상 수상작들 (2) | 2007.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