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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y Photography

Robert Capa / 로버트 카파의 사진과 삶

"카파는 카메라가 차가운 기계에 불과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모든 의심을 넘어 증명해 보였다. 카메라는 펜과 마찬가지로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카메라는 인간 이성과 감성의 확장일 수 있다." - 존 스타인벡

로버트 카파의 사진과 삶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앙드레이 프리드만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31년 독일로 건너가 유태인 박해와 더불어 공산주의 동조자로 낙인찍혀 비밀경찰에 투옥, 풀려남과 동시에 추방명령을 받는다.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으나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했던 그는 말이 필요없는 카메라를 택하게 되었다.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사진에 관한 일을 하게된 이 젊은이는 좀더 가까이, 좀더 빠르게 찍는 사진기술에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취재 임무를 맡게되어 레온 트로츠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게되어 사진으로 돈을 버는 첫 경험을 하게 되었고, 정식 사진기사로도 인정받게 된다.

1934년 앙드레이는 혁명가 게르다 타로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실력없는 헝가리 사진사가 넘쳐나던 파리에서 두사람은 로버트카파라는 가공의 미국 사진작가를 만들어 내고, 자신들의 사진을 카파의 이름으로 신문사에 비싼값에 판매한다. 결국 꼬리가 밟혔지만 뷰에 매거진 편집장 루시엥 보겔이 앙드레이의 실력을 인정했기에 넘어갈 수 있었다. 이후 앙드레이는 로버트 카파라는 사진작가로 파리에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헤밍웨이 등과 친분을 맺는다.

36년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공화파측을 맡아 사진을 찍던 카파는 9월 5일 코르도바 전선의 참호에서 뛰쳐나간 공화파 병사가 기관총에 머리를 맞아 죽는 순간을 순식간에 거의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러 필름에 담았다.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1936

너무나 리얼했기 때문에 사진의 순수성의 의구심을 의심하는 사람까지 생긴 이 한장의 사진으로

카파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기자가 되었다.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을 통해 세계적인 사진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정작 사랑하던 게르다 카로를 전차에 깔리는 사고로 잃게된다.


38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으로 가 전쟁의 참상을 보도한 카파는 유럽으로 돌아와

다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들어가 내전의 마지막 사진을 찍어 보도했다.



파리해방후 독일인의 아이를 가진 여성을 비난하는 군중들. 전쟁뿐 아니라 전쟁이 낳는 비극을 담아내었다.

이후 미국으로 넘어간 카파는 1944년 6월 6일 제16보병사단 소속 병사들과 상륙정을 타고

노르망디 레드비치로 접근해 들어갔다.

상륙정의 뚜껑이 열리자 마자 빗발치듯 총탄이 날아들었다. 역사에서 기록하는 노르망디 전투였다.



노르망디를 촬영한 카파의 사진, 이 사진은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멘트로 유명하다

카파는 총탄과 포탄 소나기 속에서 정신없이 카멜의 셔터를 눌렀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와 셔터를 누르는 손이 마구 떨렸고 그 떨림은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로버트 카파는 학살이 벌어지는 노르망디 해안에서 직접 걸으며 셔터를 누른 유일한 사진사였다.



연합군이 시칠리아 트로이나에 진주한 직후 응급치료를 받은 아이를 안고 있는 현지 주민 모습.
1943년 8월 미군은 1주일간의 고전 끝에 트로이나를 탈환했다(위).
1944년 6월6일 감행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공격 제1파 부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유명한 전투장면은
바로 카파가 찍은 이 사진들을 원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아침 로버트 카파가 촬영한 3통의 필름은 구축함에 실려 런던 라이프사 지국으로 긴급히 전달되어

현상작업에 들어갔다. 필름을 전달받은 현상기사는 흥분하여 그 사진을 빨리 보고 싶은 욕심에

서둘러 가열했다가 감광젝이 녹아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100여장의 사진 중 겨우 11장 만이 암실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사진들은 초점이 맞지않고 심하게 흔들렸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전달해주는 셈이 되었다. 로버트 카파는 전설의 보도사진작가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후 로버트 카파는 그의 친구인 브레송, 조지로저등과 함께 매그넘을 결성한다.

이들은 언론의 입맛에 맞는 사진을 제공하기 보다 작가의 개성이 반영된 독창적 사진을 일반에 선보이려 했다.



프랑스가 독일군 점령에서 해방된 1944년 8월 26일 파리에서 한 꼬마가 탱크 위에 앉아 축하 퍼레이드를 보고 있다.

이렇게 결성된 매그넘은 첫 프로젝트로 세계를 분담하여 촬영하기로 하였고 카파는 모스크바로 향했다.


48년 중동에서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카파는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고,

취재한 사진은 어윈 쇼에 의해 책으로 만들어졌다.


팔레스타인에 다녀온 카파는 한국전쟁에는 가지 않았다. 이무렵 카파는 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카파는 전쟁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결심하였고 51년 매그넘의 대표가 되었다.

피카소 및 영화배우들과 사진작업을 하였고, 일본에서 전시와 사진을 촬영하다가

친구였던 쟌 모리스로 부터 베트남으로 들어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쟌 모리스는 카파가 노르망디 사진을 촬영할 당시 라이프지의 영국 지부장이자,

암실기사가 카파의 사진을 녹여버렸을때 맨 먼저 뛰어가 필름을 구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카파에게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할 것을 부탁하는 도중

카파의 친구가 그곳에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소리를 수화기를 통해 들었다고 한다.

카파는 베트남으로 향했다. 그에게 베트남은 5번째 전장이었다.

그는 이것은 '어쩌면 마지막 전쟁이 될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54년 5월 카파는 홍강 델타지역 전투를 목격하고 8시간후 다른 지역으로 프랑스 군과 함께 이동했다.

그는 들판을 전진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찍기 좋은 위치로 옮겨 다녔다.

그는 풀이 무성한 둑 위로 올라가 두번의 셔터를 누른후 지뢰를 밟고 말았다.

폭음과 함께 그의 왼쪽 다리는 사라지고 복부와 위에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인도차이나 전쟁, 이 사진을 찍은후 카파는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군은 그를 베트남 의사에게 보내 응급치료를 했으나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로버트 카파는 왼손에 카메라를 쥔채 그렇게 죽었다.

그의 콘탁스 카메라는 현상을 위해 비행기로 옮겨졌다.


"종군기자란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 앞에 드러내 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사람 한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
"만약 당신 사진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다."

Robert Capa


Robert Capa

출생 - 사망 :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 - 1954년 5월 25일

경력 -1948년 팔레스티나 이스라엘 독립전쟁 촬영
1947년 사진 통신사 '매그넘' 결성
1938년 중일 전쟁 촬영
1936년 스페인 내란 촬영
1935년 로버트 카파 개명 보도 사진 시작